난설헌의 고향에서 인정(人情)을 만나다
  • 모용복선임기자
난설헌의 고향에서 인정(人情)을 만나다
  • 모용복선임기자
  • 승인 2020.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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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
생가 지붕서 어미 잃고 울부짖는
탈진 상태의 새끼 고양이 두마리
난설헌문화제 관계자에게 말하니
친절한 설명·감사표시 가슴 뭉클
며칠 전 연락이 왔다. 난설헌문화제를 무사히 마쳤다는 행사 관계자의 전언이었다. 지역신문 보도와 사진 몇 컷을 곁들여 SNS로 보내왔다. 앞서 나는 행사 개최 소식을 신문에 실어 필자가 거주하는 지역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행사가 일회성이고, 열린 때로부터 이미 여러 날이 흐른 터라 스트레이트 기사로 하기에는 부적합함을 느껴 당시 있었던 일화를 곁들여 싣기로 했다.

정동진을 거쳐 오죽헌 단풍나무 아래에서 여행의 피로를 잠시 내려놓은 뒤 허초희 생가에 도착한 것은 이미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문학소년시절부터 27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천재 여류시인을 흠모해 왔기에 생가터에 발을 들여놓는 감회가 남달랐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 때의 여류 시인으로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데 남다른 천재성을 드러냈던 그는 8살 때 자신을 신선 세계의 주인공으로 묘사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라는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허난설헌의 삶은 결혼 이후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시를 쓰는 며느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시어머니와 무능한 남편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차례로 잃고, 친정은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몰락하고 말았다. 결국 천재 시인은 여성의 몸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철옹성 같은 사회의 굴레 속에서 몸부림치다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가 죽기 전 남긴 절명시(絶命詩)가 아직 남아 전해져 가슴을 저미게 한다.

생가 안에 마련된 영정 앞에 서서 400여 년 전 이 땅을 외롭게 살다간 난설헌의 굴곡진 삶과 한을 생각해 본다.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뿌리 깊던 조선 땅에서 천부적인 시적 재능과 빼어난 감수성을 지닌 여성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조선에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김성립과 혼인한 것, 이 세 가지가 한스러웠다는 그녀의 피맺힌 절규가 들려오는 듯했다.

한 관람객이 허난설헌 생가 지붕 위에서 어미를 잃고 헤매는 새끼 고양이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
난설헌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사이 다급하게 찾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달려가 보니 새까만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지붕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울부짖고 있었다. 아마 어미를 잃고서 혼자 지붕에 남겨진 모양이다. 그런데 울음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반대편 지붕 위에서 또 다른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어미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이 얼룩 고양이는 낙오된 지 이미 한참이나 지났는지 목소리는 갈라지고 다리는 맥없이 풀려 있었다. 반대 편 형제가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연신 용마루에 발을 올리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번번이 미끄러져 내렸다.

이대로 둔다면 새끼 고양이들은 허기와 추위로 밤을 넘기기가 어려워 보였다. 119에 구조요청을 하니 동물은 구조대상이 아니라며 관할 지자체에 얘기하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강릉시청 동물정책과에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사정 얘기를 하니 담당자를 보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수 십 분이 지나도 동물 구조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초조해져왔다. 날은 저물어 가고 숙소로 가기 전 시장에 들러 이것저것 장도 봐야 하는데, 이대로 고양이들을 두고 갈 수도 없고 정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가 앞 정원에서 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인부들을 붙잡고 물으니 관리직원은 퇴근한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근처를 둘러보니 왼편 입구 쪽에 (사)교산·난설헌선양회 사무국 간판이 걸린 간이건물이 보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여직원 한 분이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열리는 난설헌문화제를 주관하는 (사)교산·난설헌선양회 김은경 사무국장이다. 나는 간단히 내 자신을 소개한 후 생가에서 있었던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김 사무국장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라 했다.

“안그래도 오늘 오전부터 그러고 있어 우리도 걱정하고 있는 참입니다. 특히 내일 행사가 있어 혹시나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안 되겠기에 시에 전화를 했는데 아직 담당자가 안 오고 있네요.”

그러면서 바쁜 여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며 감사인사를 했다. 김 사무국장은 야생 고양이는 인기척이 있으면 새끼를 찾지 않으며,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어미가 와서 새끼를 데려갈 수도 있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또 고양이를 구조하게 되면 반드시 연락하겠다면서 차로 향하는 우리를 뒤따라오며 매실주스 세 개를 건넸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 쯤 김 사무국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새끼 고양이가 지붕에 있을 때와 없을 때 촬영한 사진 두 장. 그리고 강릉에서 편히 지내다 가라는 인사말이 담긴 문자였다. 행사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밤늦게 연락해준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나는 답례로 난설헌문화제 행사 기사를 신문에 실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전 그 사무국장으로부터 지역신문에 실린 문화제 행사 기사와 함께 직접 찍은 사진 몇 장이 온 것이다.

계획대로 되는 여행은 편할지는 몰라도 재미는 없는 법이다. 여행의 참맛은 뜻밖의 일을 겪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 색다른 인생을 경험하는 데 있는지 모른다. 강릉에서 꿈에 그리던 난설헌을 직접 만나고 따뜻한 인정을 덤으로 얻었으니 이만하면 좋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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