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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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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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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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고독은 정신을 병들게도 하지만 적절한 고독은 지나온 삶을 투영하여 성찰하는 창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혼자만의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 곳은 메말라있는 내 마음을 소생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겨울 산이다. 고독하기론 겨울 산만한 게 없다. 상념에 잠긴 채 홀로 깊은 산속을 걸으면 내 딛는 발길마다 바스락대는 낙엽과 바람결에 서거럭대는 마른 풀잎 소리만이 적막을 깨운다. 꽃 지고 잎도 진 성긴 숲에 숨을 곳 없는 새는 우짖지 않고 달음질하던 냇물은 하얗게 얼어붙어 몸져누웠다. 짐승들이 남긴 희미한 발자국마저 흩날리는 눈발이 지우고 있는 푸서리 땅에 봉긋하게 남아있는 무덤은 세월이 삼키지 못한 유일한 흔적, 이끼 덮인 비석 옆에 홀로 서 있는 노송에 기대어 가만히 눈감으면 요령을 따르는 애가의 슬픈 노래 들릴 듯하다. 여린 가지 모두 삭아 떨어지고 둥치만 남은 고사목 위를 맴도는 까마귀 무리, 희뿌연 그 하늘 우두커니 바라보면 마음을 비우고 다잡으며 보듬기엔 겨울 산만한 게 없다.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난날을 뒤돌아본다. 삶이 애절한 이유는 한정된 시간만 살 수 있는 필멸의 존재라는 핍절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갈구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살은 날들을 체에 쳐서 거르면 응어리진 무거리 아무것도 남지 않고 먼지 되어 바람에 날려가듯 홀홀한 영혼으로 떠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산다는 게 그리 녹록한 것이던가. 뒤돌아보면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후회가 남는 게 삶이다. 물론 삶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치밀하고 정교하며 완벽하게 살아낼 수는 없는 것이지만 삶이 남기는 후회는 대부분 ‘한정된 시간들을 무의미하고 나태하게 살았다는 것과 진리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나는 얼마나 미욱했던가. 단 한순간도 되돌릴 수 없기에 어떤 순간도 삶 아닌게 없는데 목표치에 도달해야 그때부터 행복해질 것이라 여기고 허겁지겁 살아왔지만 정말 그 이후로 아무 문제가 없었던가. 삶은 항상 새로운 문제들의 연속이었다. 가난해도 삶이고 아파도 삶이였던 것을. 정현종 시인의 시 한 구절처럼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99억을 가진 사람이 100억을 채우지 못했기에 나는 아직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과 무엇이 달랐을까. 그뿐이던가! 소중한 시간들을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주저앉아 늘어진 채 무수히 허비해 버렸다. 틈만 나면 텔레비전과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탕진하던 내 넋은 또 얼마나 천박해졌던가.

삶의 본질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분적인 것들이 잘못되면 전체가 어그러진다. 진리 안에 정의가 있고 성실도 있고 자애와 겸손과, 사람이 마땅히 추구하고 행해야 할 모든 도리와 이치가 들어있다. 다툼과 갈등과 증오와 타락은 진리의 범주 밖에서 발생한다. 진리는 진부함에 있는 것인데 나는 그동안 보편적인 진리를 삶의 여러 부분에서 얼마나 등한시하고 멸시했던가. 희망을 갈망하되 욕망에 대해서는 초연해야 되는 법인데 욕망을 희망으로 여기고 쫓아가다가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일들이 한두 가지였던가.

산골짜기 아래를 향해 늘어진 내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는 나의 됨됨이를 생각한다. 사람이 아무리 큰 꿈과 많은 지식을 가졌다할지라도 그 사람의 품성과 인격을 초월한 결과를 빚어내지는 못한다. 결국 사람은 그 됨됨이만큼만 된다.

좋은 품성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인생도 좋은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골짜기로 불어오는 찬바람에 나뭇가지마다 비명을 지른다. 얼어 죽은 듯 저 거무죽죽한 목피 속에 푸른 잎이 들어 있고 붉고 노란 열매도 들어 있다. 밤마다 비추는 달빛도 스며있고 바람의 속삭임도 들어 있다. 곧 봄이 오면 나뭇가지마다 푸른 잎 돋고 꽃 벙글리라. 얼어붙은 시냇물도 춤추며 노래하리. 하얀 구름 흘러가는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한다. 성취를 갈망하기 전에 나의 됨됨이의 지평을 넓히고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그리하여 일상의 매 순간들을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며, 진리를 따라 순치에 이르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두 손을 꼭 모은다.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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