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시절, 그땐 어둡고 가난했지요
  • 경북도민일보
내 어린시절, 그땐 어둡고 가난했지요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21.02.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술자 : 송진복, 채록자 : 김나연
고향 신광서 4남매 중 셋째
국민학교 기성회비 낼돈 없어
결석 했다하면 한두달은 기본
맨주먹으로 스물세살에 결혼
모아둔 돈으로 경운기 구입해
이웃 밭에서 일하며 살림꾸려
지금의 송진복 할머니.
동네 소꿉친구들과 한 컷. 맨 오른쪽 끝이 송진복씨다.
23세 처녀시절의 송진복씨.

 

 

기록되지 않은 삶은 기억되지 못하며 결국 사라지고 만다. 포항의 기북과 기계, 죽장 등 산골을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찾아봤다. 는 포항문화재단의 협조를 받아 권역별시민제안사업으로 진행된 기억재생사업의 일부를 6회에 걸쳐 시리즈로 연재한다. 6명의 구술자에 대한 채록은 경북기록연구회 시민채록단이 맡았고 도서출판 아르코가 책으로 엮었다.





고향

신광 흥곡2동 당내카는데, 우각 맞은 편요. 우각 못에서 건너 비학산 아래 보이는 마을에서 나고 자랐어요. 가족이 여거(현재 기계 한 동네에 사는) 큰 언니. 그 다음 오빠, 내고, 막내동생 4남매라요.



신광초등학교

일학년 드가더니 글씨도 거꾸로 쓰고 내가 학교 안간다카더래요. 그래가 울 아버지가 꺼집어내놔버렸어요. 근데 한 3년 있다가 다시 들어갔지요. 그래도 또 내 동생이 내카 일곱 살 차이거든요. 알라(아기)본다고 학교 못가고요, 밭 메러 가면 따라가야 되고 이래저래 또 결석하고요. 결석 천지로(많이) 했어요. 그때는 학교 못가는 아 천지라요.

아침 8시에 공부 시작했는데, 우리는 당내에서 걸어갔는데 근 한 시간 걸어요. 근데 난 우리엄마가 맨날 아파가, 7살부터 내가 설거지 하고 9살부터 내가 밥해먹고 학교 다니면요. 그때는 있는 사람 쌀밥해 먹지, 없는 사람 우리는 보리쌀 끓여 먹잖아요. 보리쌀 끓이면 밥이 늦거든요. 좁쌀이 전신에 흙이고 돌이라서 그거 일곱 여덟 번 일고 밥하면 늦가(늦게) 먹고, 동네 나오면 저 밑에 갱빈(강변)에 학교 다 간 아들 무디 무디(무리) 지어 걸어가이. 그리 쫓아가면 가슴 여가 펄떡거리며 아파가 요래 있고. 그런 식으로 학교 다녔어요.

비 왔다하면 그랑(개울) 못 건너가 오빠나 아버지나 어른들 와 건너주고 저쪽서 선생들 와서 받아주고 그랬다카이요. 신광에서 장백가는 데 전신에 갱빈이라 글로 다녔다요 학교를. 밥도 실컷 못먹는데, 없어가요. 밥을 못 싸서 가면 학교 거 운동장에 큰 가마솥을 몇 개 걸어놓고 아지매들 와 끓여가지고 강냉이 죽을 쑤어가지고 줄 세워놓고 주고 이랬다카이요. 학교가면 강냉이 죽이라도 묵고 집에 오면 굶을 때 천지지요.

글코 그때 기성회비요. 집에 오면 안 주제, 학교가면 교무실에 불려가야제. 그거 싫어서 결석했다하면 한달 두달씩 결석했다하이요. 그게 싫어서 한번 결석했다하면 한 달 두달. 그때 석차카드대로 앉았거든요. 시험 쳐 1번 2번 이래 앉는데 처음에 앞에 앉제요. 한 열흘쯤 뒤떨어져요. 그러다 최고 꼴지 앉아요. 또 며칠 지나면 앞에 가 또 앉고 그랬어요. 교실이 없어가 나무그늘 밑에서 배우고 토성1, 2동 상옥1, 2동 남의 동사무실에 가서 배우고 그랬어요. 면에 회의실에도 우리 공부했어요.

산에 나무도 하러 가고, 솔방울이도 주우러 가고 갈비도 끌러가고 그랬어요. 최고 재밌었던게요. 교실을 짓는 데, 우리는 쉬는 시간에 그때는 가방 없어 다 보재기라요. 줄지어서 토성 앞에 그랑에 가가요 자갈도 주워오고 모래도 주워와가 그걸로 학교 지었다카이요. 아들로 시켜가. 내내 줄서가 다니며 그거 주어(주워) 다니면 며칠 안 있으면 책보자기 다 떨어졌다카이요. 옛날에 그래 살았어요.

5학년 때 우리 반에는 토끼를 먹이고 1반은 닭을 먹였어요. 당번이 있잖아요. 몇 명이서 조를 지어가 당번을 하면 인제 우리는 토끼풀 퍼뜩 주고 놀러를 가는거라요. 1반은 그날 머스마(남자 아이)들이 인자 또 당번인데 이놈의 종내기들 또 와가고 뭐 모이주고 놀러 가뿌고 우리는 닭알 주워서 팔아서(장내 가게에) 과자 사 묵고요. 딸아들이 꾀가 많잖아요. 토끼 열 몇 마리 키웠고, 닭은 한 스무 몇 마리 키웠고요.

졸업식 때, 졸업비가 310원이고 이 앨범 값이 25원요. 학교에 560원을 못내가. 인제 졸업장도 못 찾을 형편이 됐고 앨범도 못 찾을 형편이 됐는데, 6학년 담임 선생님이 보태줬다카게네요.



누에먹이기

누에는 내 처녀 때 먹였거든요. 누에를 많이 쳤어요. 내 클때요. 농협에서 누에씨가 나와요. 그걸 구들목같은데 신문 같은 거 펴서 놔 두니까, 어느 정도 되니까 벌레가, 개미 같은 게 나오대요. 까만 개미 새끼같은 거 잔잔하이. 그게 점점 커갖고 인자, 아주 잘게 똥을 또듬아 싸려주면, 고게 똥을 묵고 커요. 그게 한 잠자고 두 잠자고 세 잠자고 넉 잠자고 올라가면 고치를 만든다카이요. 봄누에 가을누에 두 번 있어요. 누에치기 일 년에 두 번. 정부에서 받지요. 꼬치 1등, 2등, 특등 등급 나온다카이요. 그러면 목돈 거머지고 그라지요. 신광에는 담배 농사하는 사람 별로 없었어요. 누에를 많이 했어요.



엄마

우리 엄마가 가을만 되면 방에서 머리를 감았어요. 우리 동생 놓고 조리를 못해가요. 못 얻어먹고요. 육십일곱에 돌아가셨어요. 우리 집은 논이 하나도 없었고, 아버지가 누에 밭을 우각사람한테 작은 걸 사서, 소나무 캐내고 개간해가 거다 뽕 숨었지요. 뽕밭에 누에 치고, 보리 좀 갈고, 콩 좀 갈고, 조 갈고 그래 먹고 살았지요. 제가 결혼 하고, 친정에는 자주 못가고 일 년에 한번 엄마 아빠 생일 때 가지요. 명절 때도 못가지요. 환갑 때 가고요.



결혼 작정


울 엄마 아버지가 싫대요. 거 보내기 싫다. 골짜기도 골짜기고, 거 싫다했어요. 근데 12월 30일 날 선보고요. 1월 12일 결혼했어요. 처음에 보고 어떻고 그런 거 없고요. 저는 그냥 술 안 먹는 거, 그거 밖에 안 생각해요. 우리 아버지가 워낙 술을 먹어서요. 우리 아저씨 원래 술 못 먹니더. 지금 칠십다섯이거든. 술 한 잔도 안해요. 이제껏 살아도 손가락 하나 맞아본 역사도 없고 맞을 일도 없고요. 안 그래도 억울한데 맞고 누가 사노 그래요. 황영수 어르신!



맨 주먹으로 간 시집

맨 주먹으로 시집 왔어요. 나는 이불도 한 채, 옷도 한 벌 안 해 갔어요. 경남모직이라는 가다마이(자켓) 오빠가 해 주는 그거 한 벌 뿐이었어요. 시계도 자기 시계, 총각 때 있던 시계하고. 결혼을 그래 했다카이요. 난 아무것도 안 가져간다 했어요. 엄마 아버지 못사는 게 싫어서. 여름 이불도 하나도 안 사갔어요. 여름에 뭐 덮고 잤느냐 하면, 이불 싼 보재기 있지요. 여름에 그거 덮고 살았어요.



감곡리, 지게 없이 못살아요

신광은 친정이고 시집은 죽장으로 갔고, 거가 죽장면 감곡리 카는덴데, 한티재 굴 바로 지나, 오른손 편에 거가 감곡리. 똑바로 가면 정자고. 거 감곡리 시집갔어요. 오남매 둘째 며느리로요. 스물세 살에 죽장으로 시집 와 가, 죽장 감곡에서 첫 아 낳아가 돌 지내서. 그러니 삼년 살다가 여(기계면 화대리)로 나와 이 곳에서 사십오 년 살았어요. 죽장오니 아득하지요. 이런데도 있는가 싶지요. 그 동네는 옛날에 지게 없으면 못살아요. 내 어릴 적 신광 전체에 불이 들왔거든요. 왜냐하면 코오롱 아주 회장 이원만씨 있잖아요. 그이가 우리 학교에서 최고 1회 선배거든요. 국회의원했잖아요. 자유당 시대. 그이 땜에 신광에, 안강하고 같이, 발전됐어요. 기계 여 보다 전기가 빨리 들왔어요. 그런데 내가 어릴 적, 시집 온 언니 기계집 오면 호롱불 밑에 밥 먹었다카이요. 근데 제가 시집와 죽장오니 전기가 없어요. 산골로 와 놓이니께. 결혼 와서 잔치라고 첫날밤에 색시방이라고 촛불을 세 개 켜도 어둡더라고요. 그날은 특별한 날이라고 촛불 켰지요. 다음부터는 호롱불 켰지요. 석유 부어 가지고 하얀 거, 호롱불 썼지요.



곤궁한 살림살이 일으키기

쌀 두 되하고, 지렁(간장) 반 되, 된장 반 국 단지, 그거만 갖고 죽장서 기계 나왔다니까요. 숟가락 다섯 개, 그릇 다섯 개 내 손으로 샀어요. 아들 아버지가 계속 남의 일하고, 삼십 몇 년 전에 비학산 다 탄 거 큰불 난 거 아는기요. 불 난 뒤에 나무 벗긴다고 돈 벌고. 남의 일 해가 돈 벌고. 내내 남의 일하는 판이지요. 경운기를 샀어요. 농사짓고 경운기가 있으이 남의 일을 많이 하고, 옛날에 타작기계 반자동 있잖아요. 들고 다니며 하는 거요. 그거 들고 타작 해가 벌고. 남의 일 해가 벌고. 경운기가 논 썰어 주고. 그래그래 해 가. 버는 게요. 아들 학교 시키고요.



부녀회장 12년 봉사

나는 부녀회장 89년도 3월부터 2000년도 12월까지 하고 내줬다카이요. 그러이 내가 아무것도 몰랐는데요. 내가요 새마을 때문에 살았는기라요. 부녀회장하면서 새마을 교육 계속 받으니까 도교육도 받고 시교육도 받고 저 서울도 가고, 마음을 굳게 먹었지요. 교육을 자꾸 받으니까 살아야지, 하고 내가 느꼈지요. 부녀회에서 들로 다니며 약병 줍고 그런 거 모아가 부녀회 회비 모으고요. 또 숟가락 젓가락 종바리 밥그릇, 그때 에나멜 그릇요. 그거 사가 세(대여)를 나았다카이요. 하나에 10원도 받고 20원도 받고, 그때는 집에서 잔치했잖아요. 거 그릇 세 낸 거지요. 그래 부녀회 자금 모았지요.



가난과 함께 지낸 가족들

우리 아들은요. 진짜로 소세지도 하나 못해주고 맨날 콩잎파리 깻잎파리 안 있는기요. 겨울에도 그거가 도시락 반찬 싸주고요. 남의 아이들 옷도 수타 얻어 입혔어요. 친구 옷, 강동 형부네 옷 얻어 입히고요. 얼마 전에 딸 아가 하는 말이 엄마는 얻어와 나를 이양(바로) 주지도 않았잖아. 언니 실컷 입고, 언니 입기 싫으면 날 줬잖아. 날 맨날 헌 옷 줬잖아.해요. 그게 요새 돈 최고 잘 벌어요. 아들이 그케요. 엄마 우리 철 빨리 들어가 그래 시시마꿉 살 길 찾았잖아, 그래요. 그래 살았니더.

큰 불난 뒤에 산 파는 거 하러 아저씨가 다녔거든요. 새벽에 가면 인삼을 사가 총총 썰어가 들깨가루하고 꿀하고 재가, 저거 아버지 밥해가 싸주면, 그걸 한 술 먹으면 숨이 덜 탄다고요. 딸 아들이 그랬대요. 우리 어릴 때, 아버지 간 뒤에 그릇을 보면 달싸하고 고소한 데 뭔동(무엇인지) 우리는 안 주고 아버지만 주노?했대요. 아바이를 먹여야 아들을 먹여 살릴 거 아인기요.



가족들과 직접 집짓기

92년도 물 난리 나고 집 기둥 무너지고, 92년도에 헐고 이 집을 지었어요. 이 집 지을 때요. 우리 가족들 손으로 집 다 지었어요. 전부 딴 사람은 포크레인으로 짓는데요. 우리는요 그랑(개울)가 경운기가 모래 채우고요. 저거 아버지는 계속 세면(시멘트) 섞고, 난 밥 참 해 줘가며 계속 시멘하고, 우리 큰 딸 아는 계속 벽돌 옮기고, 낯이 발개가(붉게) 탔어요. 가족들이 집지어가지고 20일 만에 들왔어요. 지금 이 집이요. 
자료제공=경북기록연구회·도서출판 아르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