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마지막 선비, 한학자 목천 이희특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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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마지막 선비, 한학자 목천 이희특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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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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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 이희특, 채록자
기북면 덕동마을 오남매 중 셋째
훈장 父親 덕 여섯살부터 붓 잡아
겸손하고 올곧은 선비를 동경해
한자 고전과 초서·예서 등 공부
울진 봉평신라비·한자로된 원본
한글로 번역·해석 도맡아 하기도
木泉 이희특 선생
아내와 함께
20대 이희특 초상화
직접 쓴 작품
윤혜주 작가와 함께

선비의 산실인 덕동마을

천혜의 자연조건과 수려한 고목들에 고즈넉한 매력까지 있는 곳, 마을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곳. 바로 기북면 오덕리의 덕동마을이다. 바로 이곳이 우리 지역의 마지막 선비, 한학자 목천(木泉) 이희특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다.



목천(木泉)이희특 선생의 탄생

“내가 5남매 중 위로 누님이 둘, 아래에 여동생과 남동생으로 5남매 중 중간이었어. 사실상 아들로써는 맏이인 셈이지. 글을 전수할 후손을 학수고대 하던 부친나이 마흔에 얻은 아들이니 늦은 셈이었지. 4살 때 젖을 떼자 훈장이셨던 부친이 학동들 글 가르치는 사랑방으로 데리고 나왔지. 그때는 호는 ‘춘파(春坡)’ 자는 ‘현석’인 선친(先親)에게 글 배우려는 학동들이 많았어. 그렇게 4살 때부터 학동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천자문을 읽고 여섯 살에 붓을 잡았지. 열 살 때는 사서삼경을 섭렵했어. 천자문을 읽은 지 8년째 되던 해에 대학을 필사본 했어. 그때는 학동들이 대부분 우리 집 책으로 공부를 했는데, 그 책을 학동들이 다 가져가버리는 거야. 그러니 내가 공부할 책이 없으니 어쩌겠어. 할 수 없이 대학을 필사하게 됐지. 12살 때였어.”



선비를 동경했다

“선비들은 자연을 좋아해 산수(山水)를 찾았어. 산수가 좋고 글벗이 있으니 자연 풍류객들이 찾아들게 되었지. 가재와 피라미 몇 마리 잡아다 매운탕 끓여놓고, 막걸리를 앞에 놓고 시를 짓고 읊었어. 멋이 있었지. 청빈했지만 유유자적하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나도 자라 어른이 되면 선비가 되리라 마음먹게 되었지.”

“사서삼경을 읽었으나 과거제도가 폐지되었어. 부모님들이 신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객지로 공부하려 보냈어. 그때 현대시와 수필 같은 현대문학을 접했지. 文, 史, 哲의 이성훈련과 詩, 書, 畵를 필수로 한 감성훈련에 자작 한시와 시조 및 현대 자유시에도 관심이 많았어.”



30년 공무원 생활을 하다

“부모님의 ‘중용지’ 덕을 어릴 때부터 가르침이 있었기에 실천하려고 했어. 집이 넉넉지 못했지만 선비는 청빈한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가르침의 영향이 있어 포항시청에서 도시계획 일을 볼 때도 한 푼 훈계 한번 먹지 않았어. 살기 힘들었고, 가지고 싶었고, 승진의 욕망도 컸지만 어머니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후회는 없어.”



덕동마을의 古遺物


“선비들이 남긴 유물이 많아. 풍류객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영향이 컸지. 마을에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 중에 사, 서, 중 가장 기본인 중용과 대학인데 한글이 한 글자도 없는 원서 원본이 있어. 귀한 유물이지. 그러니까 원본이 있으면 언해본(諺解本)이 있어야 돼. 반드시 한글로 번역을 해 토를 달아야 하는데 그 일을 내가 한 거야.”

“부모님이 너는 객지에 절대 나가지 마라 하셨어. 집안이 어려워 먹고는 살아야 하지. 살아가려니 취직을 해야지 어쩌겠어. 그래서 공무원시험을 봤어. 연일 군청에서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한 거지. 공무원 봉급이 박봉이었지. 그래서 원고를 쓰고, 비명을 짓고, 서예를 해 내가 버는 만큼은 취미생활을 하고 월급은 집에 다 갔다 줬어. 한 달에 두 번 상문제사를 봐야하고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지만 내 뜻을 잘 따라 주었으니 고맙지. 그게 부부의 깊은 정이 아니었겠나 싶어.”



수양과도 같은 선비의 일상

“지금도 나는 새벽 4시면 일어나. 공무원 생활이란 게 출근은 제 시간에 하지만 퇴근은 정해진 시간이 없잖아. 그러다보니 잠자는 시간을 줄여 새벽 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어. 퇴근해서는 10시까지는 책을 읽었어. 독서만한 게 없어. 요즘도 그 시간에 일어나 ‘이메일’이나 ‘블로그’ 카페에 글을 올리지. 고전이나 현대문학 명언 같은 글을 매일 올리는 게 하루 일과야.”

“울진 봉평신라비나 신광면 냉수리 신라비 같은 금석문 전문을 해석했어. 옥산서원 정해사지 13층 석탑이나 내연산 바위에 새겨진 글들도 많이 했어. 원래 신라어는 한자와 달라서 오역(誤譯)들을 많이 하는데 그 시대 유행했던 서체와 문장을 알아야 해. 작은 식견으로는 손을 대지 못해. 고전을 깊이, 멀리, 넓게 읽지 못한 사람은 단어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해석할 수가 없어. 다행히 나는 고전을 배워 초서를 썼고, 예서를 썼고, 전서를 썼기 때문에 할 수 있었지.

개인전은 딱 한 번 했어. 2014년 8월에 유필서예전(儒筆書藝展)을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열었어. 옥산서원 동락당에서 준비를 해 200여점을 출품했는데 서체와 한시, 문인화, 금언 같은 걸 전시했는데 반응이 좋았어. 2005년에는 조선조 과거 재현행사 백일장이 서울에서 열려 문과에 급제도 했지.”



고전을 강의하다

“포항문화원에서 20여년 고전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어. 내 나름대로 의미라면 사회교육에 나와서 시민들과 함께 인간의 기본질서와 살아가는 원칙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거지. 고전을 바탕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의함으로써 새로운 가치관을 일깨워 준 것에 보람을 느껴.”

“올곧게 절개를 지키고 두루 사람들을 사랑하며 기본과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인물이 선비야.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아 사람을 사랑하고, 바른 길을 따라 걸으며, 겸손하고 진실 된 태도로 다른 사람을 공경해야 돼.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올바른 마음을 갖추고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 옳은 선비야.”

“내가 고전을 사랑하는 이유는 진정한 선비가 되고파서였어. 하늘과 땅 세상의 모든 자연의 섭리를 깨달으며 그 고마움을 느끼고 모두를 널리 사랑하며 꼿꼿한 지조를 지키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어. 직장에서 퇴직하였거나 나이가 들어 갈 곳 몰라 하는 어른들이 글 쓰고, 이야기 나누고, 차 한 잔 하는 자리지. 진정한 공부는 나이 들어서 하는 거야. 살아있다는 즐거움으로 남은여생을 보람되게 책을 읽고, 올바른 가치관을 알고 살아있었다는 흔적이라도 남기고 가야지. 그러자면 고전을 알아야 해. 곧 책 한권 낼 생각이야. 모든 건 준비되어 있어. 제자들과 전시회 한 번 하고는 싶지만 돈이 있어야 하지 허허.” 자료제공=경북기록연구회·도서출판 아르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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