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닮은 수줍은 미소에 담긴 ‘길고 긴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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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닮은 수줍은 미소에 담긴 ‘길고 긴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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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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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 정석진, 채록자 : 이순영
열일곱에 선도 안보고 결혼
서른 둘에 영감 돌아가시고
혼자 5남매와 시부모 모셔
세탁기, 온수 없었던 그 시절
옷·이불도 맨손으로 만들어 
간첩 들이닥친 날 지금도 아찔
정석진 할머니
할머니의 보물상자
시부모님
정석진 할머니의 비녀
부부 사진

그때는 다 그랬지

옛날에 그때는 다 에럽게 살았제. 말로 우예(어찌) 다 하노. 나는 열일곱 살에 선도 안보고 결혼했다. 어른들이 하라카면(하라하면) 해야 되는 줄 알았제. 시집 오이(오니) 공구가(식구가)많더라. 시아부지, 시어무이, 육남매 맏며느리로 시집왔다.



서른둘에 영감이 돌아가셨다

그럭저럭 살다가 내 나이 서른둘에 영감이 돌아가셨다. 내가 오남매 데리고 살았다. 영감 소원이 우야든동(어떻게 하든지) 아아들(자녀들) 공부시키는 게 원(소원)이었거던, 첫째를(맏아들) 초등학교 일곱 살에 입학시켰는데, 아(아들) 할배(할아버지)가 학교 까지 업어다가 데리다 주고, 학교 마치고 집에 올 때 되면, 저 동구 밖까지 손주 마중 나가 기다릿다가 데불고(데리고) 오고 그랬다. 그 아(맏아들)가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저거(자녀들) 아부지 돌아가셨다. 참말로 우예살꼬(어떻게 살까), 앞이 캄캄하더라. 마음을 다잡았제. 우야든동(어떻게 하든지) 아~들(자녀들)이 다른 사람한테 에비 없는 자식 소리 안 듣게 해야 되겠다고….

혼자 살면서 밭일도 하고, 대식구들 먹을 밥·반찬 장만하고, 빨래하고, 물 여다 날리고(물을 길러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져오고)…. 하이고 옛날에는 물 여다 묵았지러.(물 이어다 먹었지.) 물 여다 묵는 거 무세라(물 길러다 먹는 거. 무서워라) 정지(부엌)에 있는 커다란 물두마(물두멍) 한 거(가득), 큰솥(큰 가마솥)에도 한 거, 하이고 무세라…. 신작로 건너 개울에 물 뜨러 가면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가 바닥은 미끄럽고, 골바람은 얼마나 차가운지, 물도이 손잡이에 살얼음이 끼고(생기고) 손이 쩍쩍 들어붙고 그랬다.

그라다가 수도가 들어오이 좋더라. 요새는 얼마나 좋으노, 물 얼 걱정 있나, 집안에 군데군데 물이 좔좔 나오이 좋고말고지. 뜨신물(따스한 물)도 잘 나오고….

거랑가가(냇가에 가서) 빨래하고, 옥양목 이불호청 잿물에 삶아가 그눔을 머리에 이고 거랑까지 가가(가서), 방망이 탁탁 두디리가(두드려서) 빨아다가 마당 빨래 줄에 널어놓으며 펄럭펄럭 거리며 말랐다. 요새는 그런 빨래 어딨노. 세탁기가 다 해주잖아.



산에 가서 나물 뜯고

그 뿌이가(뿐인가). 봄에는 산에가가(가서) 나물도 뜯고, 뽕따다가 누베(누에)도 치고(기르고)그랬다. 그때는 골짝(골짜기) 마다 먹을 거도 많았다. 안새알·골배이골(골뱅이골)·티골·대밭막골·피박골·배실재(벼슬재)·감남두들…. 감자밭미기에는 고사리가 많이 났고, 뱀살미기에는 참나물·머구(머위)가 많았다. 비비추·취나물·삿갓이파리·박이파리(남방잎)…옛날 동네 여자들 산으로 가가(가서) 한 보따리씩 나물 뜯어가 머리에 이고 오고 그랬다. 송기(솔가지)도 껀어왔다.(꺾어왔다.) 뚝담으로도 가고 그랬다. 요새 아들은(아이들은) 이런 이야기하머 알겠나.

골짝 물이 디게(참) 맑았다. 묵아도 됐다(먹어도 되었다.) 까재(가재)·다슬기·뻐들미기(버들치) 같은 거 많았다. 올(올해) 벌초 때 옥싯골에 너구리가 돌을 달그락달그락 뒤집으며 가재 잡아먹는 거도 봤단다. 요새도(요즈음에도) 피박골 못(저수지)하고 무들못(저수지)에 뻐들미기도 많고 골짝에 까재(가재)하고 다슬기 있단다.

앞산 밭에 뽕나무가 큰 거 몇 그루 있었다. 누에 칠 때 되면 앞산에 가가 뽕이파리를 뜯어가 이고 와가(와서), 거랑물(냇물)에 헤아가(헹구어서) 대소쿠리에 건져가 물기로 빼가 누에 밥 주고 그랬다. 누에가 고치를 올리면 고치를 다 따내서 매상대기도 하고 집에서 실 잣아(자아)내기도 했다. 고치를 한손으로 잡고 한손으로 실로 뽑아 물레에 감아가 실방구리를 만들아가(만들어서) 그 실로 베를 만들아가 옷도 만들어 입었다. 그때는 다 손으로 직접 바느질 해가(해서) 옷 만들고 이불 만들고 그랬다.

여름이불은 삼베로 만들고 겨울이불은 소케(솜) 넣어가 만들었다. 삼밭막골에 대마(삼나무)를 많이 심었다. 대마를 쪄서(베어서) 이파리는 훑어 내고 줄기를 숯 굽는 굴처럼 생긴 가마굴에서 쪄가(쪄서) 줄기를 길이대로 가늘게 죽죽 찢어가 방구리(바구니)에 담아 놓고 동가리(길이가 짧은 것)들을 잇사가(이어서) 길게 만들었는데, 다리 허벅지에다 대고 동가리 끈티(끝)끼리 접치게(겹치게) 해가(해서) 손바닥으로 눌루면서(누르면서) 비비가(밀어서) 길게 만들어가 그걸로 또 베로 짜가 삼베옷도 만들고, 밥뿌제(밥상 덮개)도 만들고, 이불도 만들고 그랬다.

목화도 심었는데, 하얗게 솜이 맺히면 그눔을 따가 와가 씨앗 빼고 물레질 해가(해서) 솜을 만들어가 이불도 만들고 요도 만들고 그랬다. 요새는 그런 이불 없다. 무겁고 빨래하기도 힘든다. 그때 사람들 다 일 마이(많이) 하고 살았다.



여름엔 보릿짚 닿고, 겨울에는 가마니 짜고

가마이(가마니)도 짰다. 나락(벼)타작하고 짚으로 가마이도 짜고 새끼도 꼬고, 이엉 엮어가 지붕도 이었다. 보릿짚도 마이 따았다(닿았다). 여름에 보리타작하고 보릿짚으로 따아(닿아) 놓으면 밀짚모자 만든다고 사러오는 사람 있었다. 겨울에 남자들은 새끼꼬고, 여름에 여자들은 보릿짚 닿아 팔기도 했다.

우리 집에 간첩도 왔데이, 옛날 여름에 마당에서 많이 잤거던. 멍석 깔고 삼베 이불 덮고 딸하고 마당에 자고 있는데, 누가 ‘아주머이~ 아주머이~’하고 부르길래 눈을 뜨이(뜨니) ‘아주머이~ 밥좀 주이소.’카더라.(하더라) 상옥사람이 길 가다가 배가 고파서 그러는갑다(그러가 보다) 싶어가 자다가 일어나 부뚜막에 있는 밥을 줬다, 밥 먹으면서 저거끼리 하는 말을 가마이(가만히) 들어보이(들어보니) 말씨가 좀 이상터라(이상하더라). 아릿집(아랫집)에 가가 ‘우리 집에 낯선 사람왔다’고 말하고 집으로 오이(오니) 삽짝 밖에서 그 사람들이 날로 보고 ‘어디 갔다 와!’하면서 날로(나를) 발로 막 차더라. 나는 팅게가(튕겨서) 집에도 못 들어오고 옆집 삽짝걸에 처박히고 그 사람들은 감남두들 산으로 가더라. 날이 밝아가 기북 지서에 신고도 하고 사람들이 감남두들로 올라가 도리솔 우에(위에) 가 보이(보니) 내가 준 반찬하고 밥찌꺼기가 묻어있는 종이가 있고,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없더란다. 지서에서 날로(나를) 불러가 조사도 하고 그랬다. 간첩이랐단다(간첩이었단다). 그때 그 사람들이 자고 있는 아들(아이들)한테 해꼬지라도 했으머 우예실로(어떻게 했겠나). 얼마나 다행이고.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5남매의 자녀

내가 자슥이(자식이) 아들 너이(넷), 딸 하나인데, 큰아들은 포항살고, 둘째는 충북 음성에 살고, 시째(셋째)는 대구 있고, 니째(넷째)는 안산살고, 딸은 포항 산다. 마카(모두) 이좋게(의좋게) 잘 산다. 내인테(나에게) 다 잘한다. 에러분(어려운) 시절에 엄마 혼자서 저거들(자식들) 키우고 고생했다고…. 고맙다.

옛 사진을 가만히 보시더니 미소가 살며시 피어났다. 아기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참 고왔다. 열일곱 살에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서른두 살에 남편 떠나보내고, 대식구 건사하고, 다섯 남매 건강하게 잘 키우신 그 숱하게 힘들었던 날들을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만사를 초월한 할머니의 표정이었다.

근래는 소리도 잘 못 듣고, 눈도 잘 안 보이고, 걸음도 불편하다. 아들네 집에 같이 살자고 하지만 내 집이 좋단다. 봉사자(요양보호사)가 와서 청소도 해주고, 밥도 챙겨주니 고맙고, 아들·며느리·딸·사위·손주들, 마카 자주 오고 올 때마다 반찬도 해오고, 맛있는 거도 가져오니 감사하다고. 마카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우애 있게 살면 좋겠다고, 나는 인제 하느님 부를 날만 기다린다고 하신다.

어둡고 추운 긴긴 터널을 지나온 정석진 할머니는 마치 찔레꽃 같았다. 수줍은 미소를 짓는 하얀 찔레꽃 같은 할머니, 세상 소풍 마치는 그날 까지 아프지 않게 사시기를 소망한다. 힘겹게 살았던 할머니들의 삶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리라.
자료제공=경북기록연구회·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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