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여행이 계속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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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여행이 계속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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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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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 LP
짐 홀의 ‘Concierto’를 들으며



음악이다

그 밤은 어둡지 않았다.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는 화려한 불빛을 수놓았고, 밤바다의 파도는 은결을 잔잔하게 부수며 어디론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1년, 아니 거의 2년에 한번 씩 급작스레 만나 이틀 혹은 사흘을 여행했고, 그게 벌써 십수 년간 지속되었다. 서로의 삶을 지켜보고 인정하고 응원하는 데에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에서 주로 만났다. 말 없는 바다는 늘 네 번째 일원이기도 했다.

제철 회로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가볍게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마시며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바다와 위스키는 언제나 옳은 법이니. 가급적 인적이 드문 조용한 장소를 찾으려 애썼고, 그러다보니 쉽사리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 문득 J가 말했다.

음악이다.

어디선가 밤을 두드리는 묵직한 음악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앵커

앵커라니. 우리는 간판에 적힌 꽤 고전적인 글씨체의 의미를 각자 유추했다. 닻이라는 이름에는 짙은 바다 향이 스미어 있었다. 머나먼 항해를 마친 선박의 안식처 같은…….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나에겐 낯설지 않은 무드였고, 주인장은 분명 노 선장일 거라 짐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도가 낮은 홀에 닻을 그려놓은 그림 한 점이 보였다. 푸른 톤의 유화는 조명보다 밝아 보였다. 어쩌면 주인장은 저 그림을 그린 화가인지도 몰랐다. 낯선 공간을 더듬거리던 중에 K가 말했다.

라가불린이다. 잘 찾아왔구나.

아일레이 위스키를 좋아하는 취향답게 라가불린 16년을 발견하곤 곧장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이끈 건 바로 그 음악이라는 것을. 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대한 스피커가 우리를 마주보고 있었다. 스피커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테고,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특히 나에게 스피커란 언제나 욕망의 대상이었다. 층·측간 소음이 걱정되어 집 안에서는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수가 없고, 작업실에서도 쉽사리 볼륨을 높일 수가 없다. 차에서는 이런저런 음악을 직설적으로 들을 수는 있겠지만 공간감을 살려 듣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는 이곳에 정식으로 초대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이유로 앵커라는 이름이 붙었건, 지금 흘러나오는 이 음악은 세이렌의 노래보다 강력하게 우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돛대에 몸을 묶고서라도 그 밤의 노래를 듣길 원했다.



짐 홀

지금, 이 음악을 들읍시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신사가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Concierto’를 재생했다. 투박하고 묵직한 스피커에서 짐 홀의 기타가 연주되었고, 그 순간부터 바다에 떠 있는 듯한 상태가 되었다. 때때로 음악은 바닥을 일렁이게 한다. 어쩌면 그건 위스키의 힘이겠지만.

우리는 술잔을 나누며 짐 홀의 연주를 들었고, 술이 반병정도 비워질 즈음 마지막 트랙인 ‘Concierto de Aranjuez’가 흘러나왔다. 한 음만을 피킹하는 기타의 서스팬스 위로 익숙한 스페니쉬 사운드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공간을 훑고, 닻 그림에 튕겨나간 다음 슬며시 우리의 귀를 채워놓았다. 트럼팻은 쳇 베이커, 베이스는 론 카트, 피이노는 롤랜드 한나, 색소포는 폴 데스몬드, 드럼은 스티브 갯, 그리고 기타는 짐 홀.

짐 홀의 톤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부드러움의 미학을 가졌다. 그러나 미니멀하게 절제된 사운드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뒤따른다. 칙 코리아의 ‘Spain’에서도, 토요명화의 시그널 뮤직에서도 ‘Concierto de Aranjuez’의 선율을 맛보았지만 짐 홀은 분명 다르다. 다르다고 말해야만 하는 음악이다.

술은 누가 다 마신거지.

우리는 아직 취하지 않았고, 아일레이에서 건너온 이 싱글몰트 위스키는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앵커로 들어오는 길은 쉽게 열렸으나, 나가는 방법은 알 수 없다. 닻은 여기 내려져 있으니, 항해는 잠시 멈춘 채다. 짐 홀은 이리저리 손가락을 옮겨가며 피킹 하지만 여전히 한 음만을 연주하는 듯 집중하고 있고, 섬세했던 우리의 밤은 슬며시 뭉뚱그려진 채 바다에 녹아버린다. 술은 이제 없다. 음악도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한동안 앵커를 떠나지 못한다. 여기, 여행이 계속되는 이 밤을 유랑하듯 우리는.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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