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발생 4년, 흥해 오일장 풍경
  • 모용복선임기자
지진 발생 4년, 흥해 오일장 풍경
  • 모용복선임기자
  • 승인 2021.0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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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 오일장 사람들로 북새통
지진피해 극복하고 활기 찾아
피해구제 지원금 지급 본격화
추석 장엔 사람들로 넘쳐날듯

지난 17일 주말을 맞아 흥해에 갔다. 이날은 읍내에 큰 장이 서는 날이다. 딸이 친구 집에 놀러간 통에 모처럼 아내와 장 마실을 나왔다. 봄이라 해도 아직 꽃을 시샘하는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하고, 세찬 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그래도 장날이라 로터리 부근엔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댄다.

한 때 지진이 휩쓸고 간 한복판에서 실의에 빠져 삶을 포기해야 했던 흥해읍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찾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한동안 이름 없던 거리의 상점엔 하나 둘 간판이 올라가고 시장엔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흥해시장이 예전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이제 지진 피해구제 지원금이 풀리기 시작했으니 올해 추석 명절 장날은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

도시는 변해가도 시골 장날은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영일민속박물관 앞에 자리 잡은 트럭 위에선 뻥튀기 기계가 간단없이 소리를 내며 쌀과자를 토해낸다. 로터리에서 칠포 방향 도로 양 편에는 시골 할매들이 전을 펼쳐놓고 왁자지껄 한바탕 법석을 떤다. 마늘, 양파, 봄동, 엄나무, 생강, 취나물, 달래, 냉이 등 갖가지 봄채소들이 도로를 점령한 채 손짓을 한다. 그 사이로 차들이 엉금엉금 거북이걸음이지만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다. 장보는 사람도, 지나는 행인도 장날엔 모두가 느림보가 된다. 그래야 시골 장이다.

철물점 앞 도로는 노점과 행인들로 북새통이다. 나도 사람들 속에 묻혀 한 무리가 된다. 리어카 위에 늘어놓은 갖가지 과자들이 발길을 잡는다. 입맛을 다시며 아내를 돌아보지만 이내 포기하고 만다. 시원(始原)을 알 수 없는 길거리 과자에 대한 불신이여…

어묵가게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내음을 뒤로 하고 떡집 앞에 발길을 멈춘다. 이 떡집은 장날이면 점포 앞에 전을 펼치고 주인이 직접 떡을 만들어 판다. 이 맘 때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쑥떡이 나온다. 아내를 채근해 오늘 장 구경을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떡집 앞엔 10여명이 좌우로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주인 할머니 손이 분주하다. 진녹색 쑥 반죽이 노오란 콩고물을 입고서 떡판으로 던져진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내 몫의 쑥떡이 수북이 자리를 잡는다. “쑥떡을 사러 일부러 왔다”고 말하니 한 개를 더 얹어 주신다. 이런 게 농촌 인심이요, 장보는 맛이다.


나는 어릴 때 엄마와 장에 가는 게 싫었다. 엄마는 단 돈 몇 백 원 어치를 사도 그냥 사는 법이 없었다. 싸움을 하다시피하며 언성을 높인 끝에 기어코 값을 깎는데 성공하고야 만다. 나는 그런 엄마가 싫었다. 하루 종일 고생해가며 팔아 봐야 얼마 남지도 않을 텐데 구태여 값을 깎는 엄마의 행동이 부끄럽기까지 해서 머리가 좀 굵어진 후로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서 가지 않았다.

어른이 돼서도 나는 방송에서 전통시장을 소개하고, 유명 연예인들이 시장을 탐방하는 프로를 볼 때면 감흥이 일기는커녕 채널을 돌려 버렸다. 전통시장보다 마트를 찾았으며, 엄마가 흥정을 벌이던 시장골목을 아예 잊고 지냈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짜조차 기억이 흐릿하게 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딸이 어릴 적 그 때 내 나이만큼 된 지금, 이따금 오일장 가족 나들이를 한다. 이제 흥해뿐 아니라 인근지역 장날은 거의 다 꿰고 있다. 흥해는 2일과 7일, 기계·청하는 1일과 6일, 장기·안강은 4일과 9일, 오천과 영해는 5일과 10일에 큰 장이 선다.

채소며 어묵이며 떡 등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장을 보는 재미도 좋거니와 늙은 상인들의 걸쭉한 입담을 듣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그리고 시골 오일장에서는 물건만 사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내 바람과는 달리 어머니가 왜 필요한 물건만 사서 잽싸게 집으로 향하지 않으셨는지 이제야 알 듯도 하다.

비록 인심이 예전만큼 아니라고들 하지만 여전히 농촌 할머니들의 주름 속엔 그들의 굴곡진 인생사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살아 숨 쉰다. 그래서 시골 장날은 어디를 가도 왁자지껄 생기와 활력이 넘친다.

지진 발생 4년째, 흥해는 아직도 지진이 할퀴고 간 상처투성이지만 무너진 담벼락을 헤치고 새 희망이 새순처럼 돋아나고 있다. 주민들 가슴 속에 꿈틀대는 역동성을 장날 풍경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장에 가는 것이 즐겁다. 이번 오일장은 언제 열리나, 달력을 짚어본다. 모용복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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