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현수막(2)
  • 경북도민일보
노란 현수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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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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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직장동료가 강원도에 갈 일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나는 바람도 쇨 겸 따라 나섰다.

도심지를 벗어나 강원도의 한적한 국도변을 달리니 조금 열어놓은 창문사이로 솔향기가 스며들어왔다. 몸도 마음도 맑아지는 듯 했다. 따라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주위풍경이 자꾸만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곡 앞을 지날 때 쯤 “차 좀 세워봐 빨리” 나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쳤다.

그랬다. 그곳은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계곡이었다. 그녀의 손을 맞잡고 서로 어깨를 기대며 밤을 지새웠던 그곳이었다. 갑자기 그리움이 불어난 계곡물처럼 거세게 밀려왔다. 주체할 수 없었다. 가슴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도 내내 그녀 생각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꼭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드디어 나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녀가 다닌 고등학교가 있는 작은 읍내 전체에 플래카드를 걸기로 한 것이다. 휴가를 내어 강원도로 갔다. 그리고 간판 집을 찾아 현수막을 제작해달라고 했다. 읍내전체에 50여장 정도 걸 것이라고 하자 간판집 사장이 누구를 찾기에 그러시느냐고 물었다. 나는 “첫사랑요. 오래전 첫사랑을 한번 보고 싶어서요” 사장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부터 사장님이 더 적극적이었다. “작은 읍내라 그렇게 비용을 많이 들일 필요가 없다. 내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 몇 군데 걸어주겠다. 그리고 디자인은 이렇게 해야 눈에 더 잘 띄고, 색상은 이 색깔이 멀리서도 잘 보인다”는 등… 아마 그 사장님도 무척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분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래전 첫사랑을 찾는 것에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난 바탕색만큼은 노란색으로 해달라고 했다. 그녀가 노란색을 유난히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현수막에는 “몇 회 졸업생 ㅇㅇㅇ을 찾습니다”와 전화번호만 넣었다. 그녀도 가정을 가지고 있을 테니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이 지나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찾을 수 있겠어. 잊자. 잊어버리자” 나는 완전히 체념하고 말았다. 회사업무에 정신이 없던 어느 오후, 책상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드르륵 몸을 떨었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전화를 받으니 “여보세요. 고향친구에게서 저를 찾는 현수막이 고향읍내에 걸려 있다기에 전화 드렸어요. 누구세요?” 나는 목젖이 말려들어가는 듯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야”라고 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짧은 한마디에 그녀도 내가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챈 것 같았다. 다음 날 우리는 당장 만나기로 했다.

커피숍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마주서서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입안이 자꾸 바짝 말라 커피를 다섯 잔은 마신 것 같았다. 나는 말했다. “그때 정말 미안했다고, 용서하라고.”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왜 그때 나를 그리 매몰차게 버렸느냐며 원망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펑펑 우는 의미는 그게 아니었다. “잊지 않아서 고맙다고. 찾아줘서 고맙다고. 이 세상에 어느 누가 30년이 지난 사랑을 찾겠느냐고. 그 누가 읍내 거리마다 첫사랑을 찾기 위해 플래카드를 걸어놓겠느냐고.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내가 얼마나 한 여자로서 행복했는지 당신을 모를 거야! 너무 고마워서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나와”

듣고 있던 나 또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말했다. 그녀도 가정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고 있더라고. 그리고 그녀가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면 된다고 했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녀를 보니 오랫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어리가 치워진 기분이라 했다.

이야기가 끝을 맺자 나는 뜨거워진 가슴을 식히려고 막걸리 한 대접을 단숨에 들이켰다. 산들바람이 앞산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아카시아 향기를 주점 안에 한 아름 부려놓고 갔다. 술에 취하고 꽃향기에 취하고 아름다운 첫 사랑 이야기에 취한 밤이었다. <끝>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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