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용기가 있습니까
  • 뉴스1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용기가 있습니까
  • 뉴스1
  • 승인 2021.05.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대한 개인이 위대한 공동체이며 위대한 국가다. 개인의 인권이 공동체의 관습이나 국가의 법보다 소중하다. 인류의 성인들은 자신들을 통해 발현된 이 깨달음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게 태어난 인간이 시간이 지나면서 네 발로 기다가, 어느 순간 두 발로 걷기 시작한다. 인간의 진화된 유전자는 일정한 시간이 되면 모든 인간이 육체적인 이족보행을 하도록 유도했다.

인간은 이제 정신적인 이족보행, 즉 자립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 부모를 떠나 선생이나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는다. 우리의 교육은, 불행히도 각자가 위대한 개인을 발견하도록 자극하는 격려가 아니라,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가 정한 직장과 직업을 위한 시험 준비기관으로 타락해 버렸다. 그런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이기적인 동물로 변질된다.

위대한 개인의 증가를 처단하고 처벌하는 사회정치 제도가 있다.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개인이나 개인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개인은 전체를 위한 대체 가능한 부속품일 뿐이다. 전체주의는 인류가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20세기 초에 등장했다. 인간은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진리란 육체적인 편리와 정신적인 안정이며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사상적인 체계다.

인류 역사를 통해 대중이 진리를 추구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진리는 자신들의 취향에 어울려야 한다. 지금 당장, 혹은 가까운 미래에,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자신이 신봉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 거짓을 신격화하여 진리로 둔갑시킨다. 스스로 만든 망상이란 통로를 통해, 자기 이익의 추구와 보장이 선이며 진리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그것에 대항하는 움직임은 악이며 거짓이다. 오늘날 권력을 잡으려는 자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자다. 대중이 진리라고 여기는 망상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그들의 미움과 집단공격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COVID-19 감염병을 통해 ‘신체의 병’과 투쟁하고 있다. 이 감염병은 모든 인류의 입에 마스크라는 재갈을 물리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라고 요구한다. 불필요한 모임을 삼가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이 신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그와 비례하여 마음의 질병을 앓고 있다. 이 마음의 질병은 점점 ‘집단정신병’으로 퍼지고 있다. 집단정신병은 집단감염병보다 더 교활하고 파괴적이다. 육체의 병은 백신주사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마음의 질병은 그 치료제가 없기 때문이다. 집단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회에서 광기가 기준이 되어 전염병처럼 퍼진다.

이 감염병은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맥락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해왔다. 집단정신병은 과거에 마녀사냥, 인종학살, 집단감금 등으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사는 현대에 가장 끔찍한 집단정신병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권력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와, 그 권력에 희생이 된 대중이 있다.

전체주의는 대중을 두 그룹으로 나눈다. 소수의 기획된 지배하는 자와 다수의 휘둘리며 지배당하는 자들이다. 이 두 집단은 급격한 병리적이며 심리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지배하는 자는 자신을 신적인 위치로 끌어올려 자신과 반대 입장을 취하는 인간들을, 자신이 소유한 권력으로 쉽게 파괴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들로 여긴다. 지배당하는 대중은 이런 병적인 지배자의 말에 복종하는 ‘양 떼’가 된다. 인류는 20세기에 등장한 집단정신병과 그것이 가져온 비극을 경험하였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20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전체주의를 ‘인간 본성 자체를 망가트리려는 시도’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시도는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병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그런 의도를 지닌 지배자와 그 의도에 세뇌된 국민들은 비상식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의 나치즘 체제와 구소련의 스탈린 체제가 대표적이다.

전체주의 아래서 펼쳐지는 사회변혁은 지배자들의 망상에 의해 고안되고 유지된다. 지배자들은 그런 망상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한다. 이 망상에 빠진 일부는 자신들이 사회 전체를 강압적인 방식으로 조절할 수 있는 지식, 통찰력, 그리고 방안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무엇이 전체주의 정신병을 야기 시키는가? 지배하는 집단을 구성하는 정치인들, 관료들, 혹은 그것에 동조하는 특정 이익집단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혀 비상식적인 정책을 남발한다. 그런 것을 신봉하고 시도하는 ‘공산주의’, ‘파시즘’, 혹은 사회를 기계로 보고 경제와 정치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테크노크라시’는 대중들을 전체주의 집단 정신병으로 감염시킨다. 이 체제의 지배자들은 ‘멘티사이드’(menticide)라고 불리는 세뇌를 통해 대중지배를 강화한다. ‘맨티사이드’는 ‘(대중의 상식적인) 마음(멘티)을 살해하다(사이드)’라는 뜻이다. 세뇌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으로 그 대상의 심리와 판단을 교란시켜 지배자들의 주장이 자신들의 이익에 직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공작이다.

대중세뇌는 공포 조장에서 시작한다. 상상할 수 있고 조작된 위협은 대중에게 공포를 심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과 아시아 전체주의 국가들은 잘못된 정보를 양산하고 그런 공포에 관한 정보의 출처를 찌라시에 감춘다. 정부 관료들과 자신들이 장악한 신문과 방송 매체를 통해 사실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비상식적인 정보, 심지어는 뻔뻔한 거짓말을 대놓고 퍼뜨린다.

21세기는 대중세뇌가 가능한 최적의 시간이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손에 든 휴대폰은 대중세계의 척후병들이다. 21세기보다 이런 전체주의 정신병을 전파하기 쉬운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지배자는 미디어를 장악하여 휴대폰, 소셜 미디어, TV, 그리고 인터넷에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만을 유통시키는 방식의 교묘한 알고리즘을 통해 대중을 세뇌시킬 수 있다. 더욱이 이 매체들은 사용자들을 동일 정보에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결국 특정 정보를 갈구하는 중독자로 만든다. 전체주의 지배자들의 세뇌는 오늘날 가장 효과적이다.

현대기술은 자신들이 보여주는 세계를 실제로 여기라고 가르친다. 그 일방적인 영상에 반박할 수도 없고 그 내용을 숙고할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다. 기술은 우리를 씽씽 달리는 자동차에 태워, 세상을 선별적으로 대충 보여주고 자신들이 의도한 설명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거기에는 명상, 숙고, 대화, 경청이 없다. 오로지 중독을 일으키는 오감의 자극만이 선이다. 영상은 언제나 이미 해답이 정해져 있는 내용으로 시청자를 세뇌시킨다.

IT기술은 그 중독자를 고립시켜 타인과의 소통을 방해한다. 우리는 친구들, 일가친척들, 동료들과의 정상적인 소통을 하지 못한 채, 손안에 든 휴대폰을 통해 끊임없이 나오는 망상적 내용에 노출된다. 자신의 생각을 변모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상적인 삶을 실천하는 멘토와의 지속적인 만남이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만남 없이, 러시아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가 주장한 ‘행동 적응’ 이론에 의한 조건반사적인 동물이 되고 있다. 파블로프는 동물이 조용한 공간에서 소외되어 일정한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 자극에 비이성적으로 일정하게 반응한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는 항상 인간에게 이 공포에 질린 현실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선전한다. 그러나 그 종착역은 소수 지배자의 손아귀일 뿐이다. 전체주의 질서는 정신이상의 질서다. 그들은 강력한 순응을 요구하여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사소한 기쁨과 창의성이 발아될 토양을 갈아엎는다. 이런 강압적인 문화는 사회 전반에 걸쳐, 눈치, 소침, 침체, 정체, 부패, 진부를 양산할 뿐이다.

전체주의 집단적인 세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소비에트 공산주의 통치에 반대한 반체제 인사였다가 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 되었던 하벨은 정부에 맞서는 시민단체와 같은 병렬구조를 만들라고 제안한다. 우리는 그런 기관들이, 정권교체 후에, 다시 소수의 지배자의 편에 서서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하는 예를 수없이 보았다.

유일한 방안은 ‘병렬 체계’의 구축이 아니라 ‘개인의 회복’이다. 개인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양심에 반응하여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등대가 되면 된다. 그 한 명이 집단사고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메아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된다. 그런 사람이 집단세뇌를 시키려는 권력자들을 향해 유머를 사용하여 그들의 정치 행위가 얼마나 유치한지 여실히 보여주면 된다.

우리는 외부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그리고 그 정보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소수 지배자들의 희생양이 될 것인가? 우리가 견디고 있는 이 COVID-19상황은, 그런 세뇌를 강화할 수 있는 최적의 배양이다. 아니면, 우리 각자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다듬어, 자신만의 횃대에 올라 자립과 자유를 노래할 것인가?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