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상은 우리의 뇌와 우주가 만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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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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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말 이전까지 음악에서 이룬 모든 것들이 미술 분야에서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말이다. 클레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음악가였던 클레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 그림, 음악, 문학의 길을 두고 어떤 길을 택할지 한동안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른 시립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을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깊었던 그는 그러나 음악은 이미 그 절정에 다다랐다고 판단, 결국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실제 클레는 당시 각광받았던 쇤베르크나 베르크는 물론 바그너와 말러 등의 음악조차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보다 훨씬 더 고전 음악인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바흐를 존경했고 미술에서도 그들의 음악적 표현과도 같은 리듬과 화음, 나아가서는 음악이 지닌 시간의 개념마저 회화에 담고자 노력했다.

클레의 그림엔 음악에서의 다양한 리듬감과 하모니를 표현하려 한 흔적들이 만연하다. 1만여점에 달하는 작품 중 ‘푸가 인 레드’, ‘호프만 이야기의 한장면’, ‘폴리포니’, ‘바흐 스타일’ 등 500여점 이상의 음악과 관련된 작품을 남겼고 ‘바흐의 대선율’과 ’모차르트의 폴리포니’를 여러 선과 색채들을 통해 표현했다.

고전 음악에 깊은 애정을 표현함과 동시에 현대음악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유지했던 클레.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그림은 피터 맥스웰 데이비스, 피에르 불레즈, 산도르 베레스 등 수 많은 현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 중 한명인 군터 슐러(Gunther Schuller, 1925~2015)의 ‘파울 클레의 주제에 의한 일곱 습작’은 재즈와 클래식이 결합된 형태의 관현악 곡으로 지금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제목 그대로 클레의 7가지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이 곡에 대해 슐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7개의 곡들은 각각 원본 그림과 약간은 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 일부는 그림의 실제 디자인, 모양, 또는 색감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다른 일부는 그림의 제목 또는 모드에서 출발했다.”

그의 음악은 클레의 의도와는 사뭇 다르게 접근되었다는 뜻일 테다. 클레가 좋아했던 모차르트나 바흐의 음악과는 거리가 먼 그의 음악이 방증이다.

‘파울 클레의 주제에 의한 일곱 습작’은 총 7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 화음’, ‘추상적인 3중주’, ‘작고 푸른 악마’, ‘요란스런 기계’, ‘아랍의 마을’, ‘무시무시한 순간’, ‘파스토랄’ 등 모두 클레의 작품명과 동일한 제목이다.

클레는 선율을 표현할 때는 선으로, 화음을 표현할 때는 블록으로 표현하곤 했는데 슐러의 첫 번째 곡 모티브인 ‘옛 화음’은 역시 다양한 색깔의 블록들로 이루어져 있다. 슐러는 다양한 색깔만큼이나 여러 화음의 진행을 그려내고 있다. 음악은 그림의 어두운 배경처럼 무겁게 시작하다 그림 안의 밝은 노란 블록을 표현하듯 완전 5도로 된 밝은 화음으로 변화한다.

두 번째 곡 ‘추상적인 3중주’에서는 선으로 표현된 그림처럼 슐러 역시 멜로디를 사용해 곡을 이끌어 나간다. 세 번째 곡 ‘작고 푸른 악마’에서 슐러는 재즈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데, “변형된 블루스 진행”을 이용했다. 그야말로 작고 ‘글루미’한 악마가 느껴진다. 이어서 네 번째 곡 ’요란스런 기계‘에서는 새의 모습을 한 기계의 그림처럼 슐러는 무조성 음악을 차용, 기계로 된 재잘거리는 새를 표현한다.

다섯 번째 곡 ’아랍의 마을‘과 여섯 번째 곡 ’무시무시한 순간‘에서는 제목처럼 아랍의 이국적인 느낌과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그려낸다. 마지막 ’파스토랄‘은, 클레의 작품에서 보이는 반복적 요소처럼, 두 개의 음과 리듬을 반복하며 ’파울 클레의 주제에 의한 일곱 습작‘은 끝이 난다.

슐러는 장르 간의 융합뿐 아니라 음악 안에서의 융합을 시도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호른 연주자였던 슐러는 신시네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주자로 활동했으나 마일즈 데이비스와 녹음 작업을 하면서 재즈에 발을 들이게 된다. 재즈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이 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클래식과 재즈의 접목을 시도했고 이내 그림과의 융합마저 이뤄낸 것이다.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클레. 그리고 그런 그의 그림을 또다시 음악으로 표현한 슐러.

슐러의 음악을 클레의 그림과 함께 감상하면 그야말로 그림이 음악이 된 듯한 착각을 가져온다. 하지만 고전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클레의 그림을 지극히 현대음악적 요소로 표현해낸 슐러의 역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예술이란 내면의 모습을 꺼내어 놓는 작업임이 틀림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표현하고픈 내면의 모습이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을 혹은 감정을 우리는 각자의 그림으로, 음악으로, 글로, 춤으로 표현한다. 수단은 다를지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같을 때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은 어떤 형태이든 같은 본질을 지닌다. 서로 다른 모습 속 그 본질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수천 년쯤 후, 세계의 모든 음악이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날이 온다면, 그땐 이 세상에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군터 슐러)

”색상은 우리의 뇌와 우주가 만나는 곳입니다.“(파울 클레) 노엘라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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