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앞세운 이 세상 모든 부모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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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앞세운 이 세상 모든 부모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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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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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국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묘지 탐방을 한다. 묘지는 인간의 생애가 마무리되는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공간 중 하나가 묘지다.

모든 욕망과 운명의 짐을 내려놓은 이들만이 머물 수 있는 곳! 나는 타인의 완결된 생애를 보며 현재를 상기하고 미래를 다짐한다. 만일 나의 지적 생활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면그곳이 어디에 있든 벅찬 가슴으로 그곳을 찾는다.

에디트 피아프와 에릭 클랩튼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묘지가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다.200년도 넘은 유서 깊은 묘지에서 찾는 이가 가장 많은 곳은 97구역에 있는 ‘프랑스의 국민가수’인 에디트 피아프(1915~1963) 묘다. 언어와 피부색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곳에 오면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샹송의 왕’이자 ‘프랑스 국민가수’로 불리는 피아프는 아버지 루이 가숑 묘에 합장되어 있다. 두 번째 남편 테오 사라포도 이곳에 합장되었다. 석관 벽면을 앞뒤 양옆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뜻밖의 이름을 보고 철렁했다.

‘마르셸르 뒤퐁’(Marcelle Dupont 1933~1935)

에디트는 48년의 생을 살면서 두 번 결혼했지만 아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이를 출산한 적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집을 나와 몽마르트르 아래서 거리 가수로 풍찬노숙하던 시절 만난 한 남자와 잠시 동거를 했고 열여덟에 딸아이를 얻는다.

하지만 딸은 두 살 때 뇌막염으로 하늘나라로 간다. 그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평생 딸에 대해서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피아프의 딸’ 마르셸르 뒤퐁이라는 이름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어떤 노래의 멜로디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그것은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이나 ‘아뇨,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가 아니었다.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이었다.

에릭 클랩튼(1945~)이 1993년에 발표한 노래다. 몇 소절을 흥얼거리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노랫말처럼 두 살 딸은 천국에서 엄마를 알아봤을까, 또 에디트는 마르셸르 뒤퐁의 손을 잡아봤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알려진 대로, 에릭 클랩튼은 1991년 아들을 잃었다. 뉴욕 맨해튼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들이 떨어져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클랩튼은 ‘티어스 인 헤븐’을 발표한다. “Do you know my name if I saw you in heaven~” 이 노래로 클랩튼은 1993년 그래미상을 네 개나 수상한다.

나는 이 노래를 부르는 클랩튼의 동영상을 유튜브로 수없이 감상했다. 그때마다 감정이 이입되어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에릭은 담담하게 흔들림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모든 게 가사에 드러난다. 묵묵히 남은 생을 완수하겠다. 미치지 않으려면 노래를 불러야 한다. 감정의 찌꺼기와 기름기가 완전하게 빠진 상태에서 그는 ‘티어스 인 헤븐’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나는 언제나 프로이트가 보여준 삶의 태도 앞에 고개를 숙인다. 구강암 수술을 33번이나 받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그는 몰핀 주사를 거부했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진통제를 맞지 않았다. 결코 맑은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타계 하루 전까지 ‘발자크’를 읽었다. 나는 그의 초인적인 의지를 ‘세계인문여행’ 55회에서 자세히 썼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다. 세계 곳곳에서 끔찍한 살육전을 겪고 나서 세상은 비로소 프로이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그전까지 빈 주류사회에서 냉대를 받았다. 반(反)유대주의 광풍 속에서 유대인인 그는 따돌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직분에 충실했다. 홀로 묵묵하게 진료와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극소수의 인사들만이 그를 인정할 따름이었다.

그 어떤 세파에도 바위처럼 굳건했던 그가 두 번 크게 흔들렸던 적이 있다. 1920년 둘째 딸 소피가 어린 아들 둘을 남겨놓은 채 스물여섯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2년 뒤 엄마 없이 크던 외손자가 결핵으로 세상을 떴다. 강철같던 정신과 의사는 처음으로 절망했다. 왜 내가 아니고 어린 손자를 데려가느냐고 신을 원망했다. 일생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소설가 박완서의 경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두 번 참척(慘慽)을 보았다. 50년 전에 딸을 교통사고로, 6년 전에는 장남을 뇌암으로 앞세웠다. 바이든 대통령의 사진을 유심히 보면, 왼쪽 손목에 특이한 것을 차고 있는 게 보인다. 묵주다. 2015년 사망한 큰아들 보가 눈을 감을 때 하던 묵주다.

우리나라 소설가 중 박완서(1931~2011) 만큼 파란만장하고 고통스러운 생애를 살아낸 사람도 드물 것이다. 1930년대 세대는 누구할 것 없이 식민지, 전란, 이산, 혼돈, 가난을 겪어야 했으니 파란만장은 그 세대를 아우르는 표제어라 할만하다. 그런데도 내가 박완서를 가리켜 고통스러운 삶이라고 한 것은 박완서가 참척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박완서는 6·25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 호영진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슬하에 1남 4녀를 둔다. 1988년에 남편이 암으로 사망했다. 배우자와의 사별은 남편이 암투병을 했기에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스물다섯 외동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침에 웃으며 집을 나선 아들이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사별의 고통이 채 아물기도 전에 들이닥친 날벼락이었다. 이 충격과 고통으로 작가는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박완서는 죽기 1년 전인 2010년에 출간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그 일에 대해 짤막하게 회상한다.

‘···나도 이십 년 전에 참척을 겪은 일이 있다. 너무 고통스럽거나 끔찍한 기억은 잊게 돼 있다던가. 기억력의 그런 편리한 망각작용 때문인지 그 당시 일이 거의 생각나는 게 없다.

나중에 딸들한테 들은 건데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우리 집 아닌 어딘가에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워 있었다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온 딸들이 엄마가 듣건 말건 위로가 되라고 한 말이, 장례식에 아들 친구들이 많이 와서 성대했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걸 전해 듣자 내가 눈을 번쩍 뜨더니 그 친구들 뭣 좀 잘 먹여 보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아아,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엄마는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겠구나 안도했다는 것이다. 삶이란 존엄한 건지, 치사한 건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93쪽)

딸 호원숙씨도 박완서의 피를 이어받아 글을 쓴다. 호씨는 한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참척과 관련, “아들의 기일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신열을 앓았던 엄마였다”고 회상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식을 앞세운 부모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름이 알려진 작고한 사람으로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자···. 또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경우는 그래도 참척의 고통이 덜할지 모른다.

오래전에 작고한 나의 어머니도 참척을 겪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의 누나를 의료사고로 앞세웠다. 어린 시절에 나는 궁금했다. 내가 두 살 때 죽었다는 그 누나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집에서는 의료사고로 죽은 누나 이야기를 하는 건 암묵적으로 금기였다.

장년의 아들을 암으로 앞세운 고향 사촌 누님을 뒤늦게 조문한 적이 있다. 누님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꺼이꺼이 통곡했다. 눈물이 다 말라버린 줄 알았건만 누님은 뜨거운 눈물을 토해냈다.

“워쩌 것어, 제 명이 그것밖에 안 되는디. 워쩌 것어.”

한강공원에서 실종되었다 숨진 채로 발견된 대학생 손정민씨 사건의 여진이 계속되는 중이다. 어느 모임에 가도 손정민씨 이야기를 한마디씩 한다.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에 따르면 전화로 인터뷰를 했지만 아버지는 혼이 나간 것 같다고 했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 있다. 참척을 본 부모다. 망각 당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참척지변(慘慽之變).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고통이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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