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요, 모르는데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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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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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 LP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을 들으며



감만상상페스티벌

‘사회적 거리두기’를 기준으로 우리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식당에서는 거리를 두고 식사를 해야 했고, 지인들과의 모임을 취소해야 했으며, 늦은 밤 노포를 찾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끊겨버렸다. 우리의 불편과 공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러스는 기승을 부렸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도 점점 높아만 갔다. 곳곳에서 삶의 불안과 무력감을 호소했고, 예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입주 작가로 지내고 있는 감만창의문화촌 역시 전시, 공연, 행사 등을 취소 혹은 축소 진행해야만 했다. 독자를 만나는 기회는 점점 줄어가고 있었고, 온라인으로 대체되는 일에도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던 중 백신이 개발되었고, 접종률이 빠르게 상승했으며, 마침내 ‘위드 코로나’라는 정부의 지침 아래 큰 행사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행사를 진행하는 주최 측이나, 참여 예술가나 모두 한치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언제든 (여느 때처럼) 취소될 수 있으며, 정상적으로 열린다 해도 최소한의 인원이라도 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감만상상페스티벌이 열렸다.



소녀

감만상상페스티벌 기간 동안 입주예술가들은 작업실을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내 방을 주로 이루는 건 책이기에 마땅히 보여줄게 없기도 해서,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엽서와 음악을 준비해놓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진엽서와 음악은 나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어야 했다. 애써 나의 공간으로 방문해주시는 분들에게 가급적 LP로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었고, 일일이 설명을 곁들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위드 코로나라 해도 마스크라는 장벽 앞에서의 소통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악을 함께 듣는다거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계획은 비켜나버렸다. 그러던 때에 내 방으로 한 소녀가 들어온다.

소녀라 부르고 싶은 까닭은 아무래도 이문세 아저씨 때문이다. 이문세가 부른 <소녀>는 상징적이고, 역사적이며, 혁명적인 구석도 있으나 어떤 직관적인 이해나 판단을 정지해버리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척 맨지오니와 칙 코리아를 거쳐 조지 윈스턴을 찾다가 우연하게 이문세 4집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이문세의 모든 앨범이 그렇지만, 4집 역시 모든 곡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기에 평소 작업하면서는 잘 꺼내듣지 않는 앨범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가을에는 이문세지, 라는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을이 오면’을 시민들과 함께 듣는 것도 좋겠다는 판단이 든 것이었다. 나는 조지 윈스턴 대신 이문세 4집을 턴테이블에 올렸다.



감만창의문화촌에 가을이 오면

분명 언니와 함께 복도를 뛰어다녔던 것 같은데, 숨으려던 것일까, 호기심에서였을까 소녀가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는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내 방으로 들어와선 대뜸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아마도 함께 온 보호자 분께서 알려준 멘트인 듯했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소설가예요. 혹시 소설가 알아요?”

소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소설가라는 직업은 생소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나는 작가라는 말을 다시 내뱉으려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소녀는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배시시 웃었다. 턴테이블에서는 <그녀의 웃음소리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말 그러했으리라.

인기가 제법 많았던 고양이 사진엽서를 꺼내어 소녀에게 건넸다. 그러자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닌가. 과자세트를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표정이라니. 나는 내친김에 음악도 공유하고 싶었다. 턴테이블 옆에 이문세 아저씨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멋진 앨범 재킷을 세워두었기에 혹시 이 노래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전설적인 바로 그 이문세를 아는지.

그건 이문세를 아냐고 확인하고자 한 질문이 아닌, 소개하고자 하는 제안이기도 했다. 고양이 사진에서 시선을 거둔 소녀가 이문세를 바라보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덤덤하게 가사를 읊어나가는 가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몰라요, 모르는데 좋아요.”

소녀는 방을 나가며 언니를 불렀다.

“언니, 여기 고양이가 있어.”

이문세의 노래는 절정을 향했고, 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번 가을은 작년과 달리 정말 더 따뜻한 듯 했다. 창 밖에는 낙엽이 지고 있었고, 재생을 끝낸 턴테이블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추었다.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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