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샤를 드골을 찬미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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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샤를 드골을 찬미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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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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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해스큐의 ‘드골’(De Gaulle)을 꼼꼼히 다시 읽었다.

얼마 전 광화문 조갑제닷컴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동그란 탁자에 놓인 드골의 ‘전쟁회고록’ 영어판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쟁회고록’은 1048쪽이나 되는 목침 같은 책이다. 조갑제 대표는 이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해 재미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읽는 중인데 중요한 내용을 번역해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린다고 했다.

우리는 드골과 얽힌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았다. 나는 주로 개선문과 샹젤리제와 얽힌 드골 이야기를 했고, 조 대표는 “드골이 교양인이면서 문장가였고 ‘전쟁회고록’을 직접 썼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책을 읽어보니 프랑스 역사에서 드골이 가장 훌륭한 지도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요? 드골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나폴레옹과 빅토르 위고라고 했는데요. 재밌네요.”

조 대표는 ‘전쟁회고록’에서 드골의 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가 특히 흥미롭다며 ‘히틀러편’을 프린트해 내게 건넸다.

집에 와서 A4 두 장짜리 글을 찬찬히 읽고 또 읽었다. 히틀러와 맞서 싸웠던 드골이 읽어낸 ‘히틀러’를 보면서 나는 소름이 끼쳤다.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문장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악(巨惡)을 바라보는 거인(巨人)의 관점은 범인(凡人)과는 이렇게 차원이 다르구나. 비로소 히틀러라는 인간의 뒤틀린 정신세계가 손에 잡히는 것만 같았다.

윈스턴 처칠도 ‘제2차 세계대전사’를 썼다. 1953년 처칠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이 책은 처칠이 구술하고 비서가 원고로 정리해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런데, 드골은 1000쪽이 넘는 책을 직접 썼다니!

대선 앞둔 프랑스에 드골 바람···후보들 “내가 후계자”

신문 국제면을 넘기다 이 제목에 눈길이 고정됐다. 지난 11월9일 드골 서거 51주기를 맞아, 2022년 4월 프랑스 대통령선거를 노리는 잠재적 후보들이 일제히 드골을 추모하며 드골 정신 계승을 선언한다는 기사였다. 후보들의 발언 중에서 눈길을 끈 것은 마크롱 대통령을 지지율에서 바짝 뒤쫓고 있는 에릭 제무르의 말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위대한 군인, 정치인일 뿐만 아니라 사상가이자 문필가였다. 오늘날 기강이 무너져 쇠락해 가는 프랑스를 보며 그를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문 기사는 연보(年譜)와 함께 드골의 업적과 관련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드골은 2차세계대전 기간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고, 종전 이후 임시정부 주석과 총리,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맡으며 프랑스 경제재건과 위상 복구를 이끌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알제리 전쟁 패배로 국제적 영향력이 빠르게 쇠락하고, 사회적 혼란마저 커지고 있었다. 드골은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기반으로 국가주도 경제개발, 식민지 조기독립, 독일과의 빠른 관계 회복, 미국 반대를 뿌리친 독자적 핵무장 등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드골은 2차세계대전 기간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고…’이다. 비록 한 문장에 지나지 않지만 이 속에 드골의 철학과 역사관이 응축되어 있다.

드골은 1890년 프랑스 북동부 릴(Lille)에서 태어났다. 벨기에 국경과 가까운 릴은 유럽축구 마니아라면 기억하는 도시다. 지난 2020~2021시즌 프랑스 리그앙 우승팀이 릴 OSC였다. 인구 23만 도시 릴 OSC가 음바페와 네이마르의 파리 생제르맹을 제치고 우승하자 도시 전체가 들썩댔다.

어린 시절 드골은 고집불통이었다. 그런 가운데 특징은 형제들 사이에서나 또래 집단 사이에서 그가 언제나 ‘대장 노릇’을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대장 역할이 방해를 받으면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교양인이자 교육자인 아버지 아래서 드골은 가톨릭 신앙과 조국에 대한 열정을 주입받았다. 소년 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이름이 같은 큰아버지 ‘샤를 드골’이었다. 저술가였던 백부는 ‘19세기 켈트족’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런 집안 분위기로 인해 그는 프랑스의 역사·전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가 파리의 예수회 교장으로 발령 나면서 가족은 파리로 이사한다. 중고생 시절 그는 문학과 철학과 역사에 빠졌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열네 살 때 ‘불쾌한 만남’이란 단막극을 쓴 적도 있다. 드골 연구자들은 이 단막극을 중시한다. 이 단막극을 근거로 드골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 절대로 겉모습 그대로를 믿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열다섯 살에는 전쟁에 휘말린 유럽을 상상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이런 미지의 모험을 두려움 없이 상상하고 이를 미화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나는 프랑스가 거대한 시련을 겪게 될 때, 내 인생의 보람은 그 시련 앞에서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는 데 있으며, 내가 그러한 기회를 반드시 얻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전쟁 회고록)

그는 자신을 ‘운명의 사나이’라고 믿었다. 그가 일반 대학이 아닌 나폴레옹이 세운 생시르육군사관학교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럽다.

중고 시절과 사관학교 시절 그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적은 중간 정도에 머물렀다. 독선적 성격인 데다 논쟁을 좋아하다 보니 종종 ‘골칫거리’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다.

프랑스 육사를 졸업한 2년 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장에서 그의 리더십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치열한 참호전이 펼쳐진 베르뒹 전투 부근에서 독일군과 싸우다 부상을 입었다. 아비규환 상황에서 부상병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었고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 2년간 폴란드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종전 후 그는 군내에서 입지를 넓히려 애를 썼으나 금방 한계에 직면했다. 그는 홀로 기갑전을 공부해 누구보다 뛰어난 통찰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프랑스 육군의 전략과는 배치되었다. 프랑스 육군은 방어적인 전략 아래 마지노 요새 구축에 막대한 국방비를 쏟아부은 상태였다. 일개 중령이 군 상층부와 다른주장을 하고 돌아다니니 상관과 동료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독일은 1940년 5월10일 프랑스를 침공한다. 세계인문여행 95회 ‘차이콥스키, 도쿄올림픽에 울려 퍼지다’에서도 언급했지만 프랑스는 43일 만에 파리를 독일에 헌납하는 수모를 당한다.

독일 침공 다음 날인 드골 중령은 프랑스 제4기갑사단장에 임명된다. 사실상, 이름뿐인 제4기갑사단이었다. 독일군은 프랑스의 예상과는 달리 마지노선을 북쪽으로 우회해 벨기에를 점령하고 파리를 향해 진격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독일군 전차 군단과 기계화 보병에 프랑스 육군의 방어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런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드골이 지휘하는 제4기갑 사단만이 독일군에 작은 패배를 안겼다. 정부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제4기갑사단의 승전은 눈부셨다. 레이노 총리는 지휘계통을 몇 단계 뛰어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한다. 항복이 임박한 상황에서 드골을 국방차관에 임명한다. 영관급 기갑사단장이 불과 한 달여 만에 국방차관으로!

국방차관 드골은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려 하자 영국으로 몸을 피한다. 프랑스 영토의 3분의 2를 독일 관할로 넘기는 정전협정에 서명한 페탱은 비시(Vichy)에 친독일 정부를 세운다. 비시정부의 군사 법정에서 궐석재판이 열렸고, 드골은 명령 불복종 죄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런던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망명 정부를 두고 있었다. 드골은 런던에서 스스로를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선언했다. 그를 따르는 군대도, 국민도, 자금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영국 총리 처칠은 처음에는 망한 나라의 국방차관인 드골을 마뜩지 않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라니. 성격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드골에게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드골은 패잔병 신세인 프랑스 국민을 상대로 메시지를 보냈다. BBC 라디오 연설로 줄기차게 프랑스인의 단합과 저항을 호소했다.

“프랑스의 병사들이여, 당신들이 어디에 있건 일어나십시오!”

패배주의에 휩싸여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프랑스인들이 드골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독일 점령지역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프랑스인은 ‘자유 프랑스’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 프랑스’는 사실상 망명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비로소 처칠이 드골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자유 프랑스’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반독일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이클 해스큐의 평전 ‘드골’의 머리말을 쓴 사람은 웨슬리 클라크 미국 예비역 육군대장. 클라크 대장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의 군사 지휘관 중 샤를 드골만큼 영국과 미국의 정부, 군대, 언론계로부터 악평을 얻은 사람은 없다. 무례하고, 거만하며, 남을 무시하고, 비협조적이라는 조롱을 당한 드골은 지난 60년간 서방 세계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그는 용맹스러운 전사이자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였고, 자신의 조국을 다시 창조한 인물이었다.”

드골은 확고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미래를 준비한 사람이다. 드골이 없었으면 프랑스는 훨씬 더 오랜 기간 나치 지배 아래 신음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랬다면 세계사는 달리 쓰였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드골이 전쟁회고록에 쓴 ‘히틀러의 최후에 대한 묘사’를 읽어본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자신의 업(業)을 종식시킨 것은 반역이 아니라 자살이었다. 그 업을 구현한 것도 그였고, 끝장낸 것도 그 자신이었다. 이 프로메테우스는 묶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심연으로 던졌다. 무에서 출발한 이 사나이는 독일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새로운 애인을 갈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던졌다.

몰락한 황제와 패배한 장군들과 멍청한 정치인들에게 싫증이 난 그녀는 미지의 이 거리의 사나이에게 몸을 맡겼다. 이 사나이는 모험적이고, 지배적이었으며, 그의 히스테릭한 목소리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본능을 자극했다.…

그는 파시즘과 인종주의를 결합한 교리를 만들었다. 전체주의 시스템은 그가 견제나 제약 없이 행동하도록 허용했다. 기술의 발전은 그의 손에 놀랍고 충격적인 카드를 쥐여주었다.…

그는 독일이란 애인을 어떻게 유혹하고 어떻게 쓰다듬으면 되는지를 잘 알았고, 완벽하게 낚인 독일인들은 주인을 열광적으로 따랐다. 최후의 최후까지 독일인들은 노예처럼 그를 모셨고, 어떤 나라 사람들이 그 어떤 지도자에게도 제공한 적이 없는 봉사를 했다.…

그의 거대한 계획은 인간의 밑창에서 나오는 저열한 힘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사람은 진흙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지 존재이기도 하다.…

히틀러의 시도는 초인적이었고 비인간적이었다. 그 어떤 주저도 없이 이런 자세를 유지하였다.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맞이한 최후의 고통스러운 시간까지 그는 절정의 순간들에서처럼 아무런 반대도 없이 강고하고 무자비하게 초인적 비인간적 자세를 견지하였다. 자신의 투쟁이 가져온 그 기억의 끔찍한 위대성을 위하여 그는 주저하지도, 타협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지구를 들어 올리려 하는 타이탄은 굽힐 수도 접을 수도 없는 법이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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