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모습으로 떠날 것인가
  • 경북도민일보
어떤 모습으로 떠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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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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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는 그랬다. 참을성 없고 무지했으며 어리석었다. 융통성도 없었으며 분별력도 불확실했다. 혈기 왕성한데다 자기 과신과 이기적인 짧은 생각은 부의 획득에 의한 쾌락의 삶을 최고로 여겼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나이 들고 철도 들면서 세상 이치를 조금씩 깨닫게 되자 자연스레 마음의 안정을 추구했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지향에서 정신적인 만족으로 가치 기준이 변전 되었다. 놓아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하는 것,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무엇이 가장 헛된 것인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 든다는 건 시드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 했던가. 그래서인지 모든 상황에서 젊었을 때보다 초연해지고 여유롭게 대처한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소중해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깊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문득문득 찾아드는 허무에 가슴속에서 삭풍이 불어대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다가오는 것보다 떠나가는 게 더 많아진다. 특히 죽음이 그러하다. 휴대전화 문자로 자주 날아드는 부고 소식에 상갓집을 찾는 일도 부쩍 잦아졌다.

젊었을 때는 죽음을 외면하거나 억압하며 생각조차 하지 않았건만, 이젠 가끔씩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한다. 어느 사람인들 그러하지 않으랴만 나는 마지막 순간이 오면 편안한 죽음이 되길 바랬다. 그저 그뿐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음이란 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의 현상으로만 치부할 게 아니라, 죽음까지 이르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사람은 간섭받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는 때가 오고 만다. 어느 시기가 되면 세포재생률은 감소하고 육체의 쇠락은 점차적이면서 가차 없이 진행되어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저하되고 인지 능력도 감퇴한다. 결국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먹지도 입지도 씻지도 못하는,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모든 인간이 맞이하는 귀결이다.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인간의 평균 수명은 남자는 22.6세, 여자는 24.4세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또한 1945년 해방 당시 평균 수명이 35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과 의학의 비약적인 발달로 평균 수명이 80세 정도로 늘어났다. 2030년경에는 평균 수명이 100세를 넘길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과거에 평균 수명이 짧았던 이유는 전쟁이나 전염병 등이 주된 요인이었다. 이런 요인에 의한 죽음의 과정은 급작스럽다. 대부분 늙어 자연사한 것이 아니었다. 16세기만 하더라도 노령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놀라운 현상으로 여길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또한 그 시절 노인은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진 지혜의 보고로서 인정과 존중을 받았으며 가족들은 노인을 부양하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이에 비하여 평균 수명이 급속도로 늘어난 현대인들의 죽음의 궤적은 길고도 느린 과정이 되었다. 관절은 고장이 나 걸을 수 없고, 눈은 침침하며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십 년 혹은 이십 년, 삼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배우자마저 먼저 떠나 홀로 남겨지면 남은 보루는 결국 요양원뿐이다. 그리고는 그토록 원치 않았던 고립되고 격리된 창고 같은 시설에서 심드렁하고 기계적인 관리를 받으며 세상으로부터 잊혀져 간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고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몰개성화된 일상을 죽는 날까지 지속하게 된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 두려워하는 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고 한다.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미 마음속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정말 두려워하는 건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과정들이다. 삶에 대한 주도권을 모두 잃고 개인적 특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획일적 시설에서 자신을 동정하고 다독거려주는 사람 없이 쓸쓸히 죽거나, 혼자 살더라도 지병으로 인해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 글을 쓰는 내게도 두려움이 엄습한다. 내 죽음의 과정이 고통 속에 길고 더딘 죽음이 될까 봐. 경멸스럽고 추한 죽음이 될까 봐. 주변 사람들이 어서 빨리 떠나기를 바라며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 죽음이 될까 봐.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더라도 끝내 찾아낼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에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만들어야 한다. 흔하게 널려 있는 것이 가치가 없듯, 죽음이 없다면 삶에서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의미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삶의 완성을 위해 한정된 시간을 살뜰하고 지극하게 살아야 한다.

노년을 위한 대비도 해야 한다.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이 항상 실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더불어 건강한 생활 습관을 들이고 유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나쁜 식습관이나 게으른 생활 습관을 지닌 사람들이 지루하고 긴 고통의 말년을 보낸다는 게 통계적으로도 나타나 있다.

나는 믿는다. 좋은 식·생활 습관을 지니고, 남은 세월을 살뜰하고 지극하게 산다면 삶의 마지막 모습은 타다만 장작이 아니라, 활활 타올라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갈 것이라고.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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