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아서 밀러 그리고 록스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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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아서 밀러 그리고 록스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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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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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 아이디어를 찾는 최상의 방법은 신문을 꼼꼼히 읽는 것이다. 그중에서 내가 꼼꼼히 읽는 페이지는 피플면의 부음기사다. 나의 먼 미래이기도 한, 타인의 완결된 삶을 돌이켜보다 보면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얻거나 번쩍이는 키워드를 발견하기도 한다.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 2021년 말 타계했다. 뮤지컬 관계자가 아니라면 스티븐 손드하임(1930~2021)의 이름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작사가, 작곡가, 음악가, 기획자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1957년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노랫말을 쓴 사람이 손드하임이다. 이 뮤지컬은 1961년 나탈리 우드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가사가 가물가물한다면 그가 작곡한 ‘어릿광대를 보내주오’(Send in the Clown)는 어떤가. 김연아가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연기 곡(曲)으로 사용해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그래미상과 토니상을 각각 8회씩이나 수상했다. 한 번만 받아도 최고의 영예인 상을.

손드하임의 발자취 기사가 더욱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는 때마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뮤지컬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60년 만의 두 번째 영화화(化). 그런데 부음 기사에서 도끼처럼 나를 내려친 것은 다음 문장이다.

‘손드하임이 미 코네티컷주 록스베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 손드하임이 록스베리(Roxbury)에서 살았었구나.

순간 코네티컷과 록스베리에 얽힌, 전의식(前意識)에 침잠해있던 이야기들이 마치 오리들이 호수 위에서 일제히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군무(群舞)를 추는 것처럼 소용돌이쳤다.

나는 록스베리를 2011년과 2012년 두 번 가보았다. 2011년 가을 휴가를 이용해 ‘뉴욕이 사랑한 천재들’을 취재하면서 뉴욕과 그 근방을 씨실과 날실로 답사했다.

뉴욕시 경계를 벗어나는 취재 장소가 몇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한곳이 록스베리였다. 나는 자동차를 하루 동안 빌려 코디네이터와 함께 코네티컷으로 달렸다.

록스베리는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를 연구하는 데 있어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 ‘세일즈맨의 죽음’의 극작가 아서 밀러. 그는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미국이 자랑하는 3대 극작가. 록스베리에서 아서 밀러는 사랑하는 사람과 살았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영면중이다.

자동차가 뉴욕시와 뉴욕주의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코네티컷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Connecticut. 코네티컷을 지나면 매사추세츠. 코네티컷은 뉴잉글랜드의 남쪽 끝이다.

한눈에 봐도 지명이 영미식 어원은 아니다. 알공킨 원주민 말로 ‘조수가 큰 강’이라는 뜻.

처음 발을 내딛는 도시 코네티컷! 아서 밀러에 이끌려 찾아가는 길이었지만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왜 그럴까. 젊은 시절 잠깐 스쳐 간 도시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는 기분이랄까. 어딘가 정겹기까지 했다.

피터 현으로 알게 된 코네티컷

재미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피터 현(Peter Hyun 1927~2019). 문학과 미식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린 사람 피터 현. 나는 1990년대 초반 주니어 기자 시절부터 그를 알게 되었다. 월간조선 기자였던 나는 그가 월간조선에 연재한 회고록 ‘바람처럼 세계를 떠도는 사나이’ 원고를 받아 다듬는 편집자였다. 소위 ‘캐처’(catcher)였다. 한 회당 200~250매 되는 원고를 다듬고 중간 제목과 큰 제목을 뽑고 관련 사진을 적절히 배치하는 게 캐처의 역할이다. 잡지가 나올 때까지 끝까지 모든 걸 책임졌다.

피터 현은 일찍 한국을 떠나 모국어보다 영어가 더 유창했다. 영어 원고를 신문기자 출신인 김준길씨(주미공사 역임)가 번역해 내게 보내왔다. 처음에는 이 편집일을 하는 게 싫었다. 최소 한나절이 걸리는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어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원고를 기다리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회고록 안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사건, 그리고 여기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했다.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연재물 초반부로 기억한다. 파리를 거쳐 뉴욕에서 활동하던 피터 현이 미국 여성과 결혼해 신혼생활을 한 곳이 코네티컷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미국 동부에 코네티컷이라는 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터 현의 연재는 1년 이상 이어졌고, 당시 월간조선 독자에게 최고 인기 연재물 중의 하나였다.

피터 현은 뉴욕 맨해튼에 집이 있었다. 그리고 여름 한 철은 프랑스의 오래된 샤토에서 지냈다. 연재가 끝나고도 그는 나를 친구처럼 대했고, 우리는 자주 만났다. (외국에서 오래 살아 나이를 따지지 않는 문화에 익숙해져서 그랬으리라) 일 년에 한두 번씩 귀국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내게 연락을 했다. 미식가이자 와인 전문가인 그는 그때마다 나를 서울의 최고급 프랑스식당에 초대하곤 했다. 그를 통해 프랑스 음식의 오묘한 세계에 대해 살짝 눈을 떴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서울의 서촌을 좋아해 우리는 서촌의 맛집 순례를 하곤 했다.

2019년 4월, 그의 부음이 실린 아침 신문을 보고 쿵 했다.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영정 속에 있는 ‘오랜 친구’ 피터 현을 대하자 눈물이 쏟아졌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부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디로 모시나요?”

“코네티컷입니다. 사별한 첫 부인과 살던 동네에 묘를 마련해두셨어요.”

아서 밀러가 사랑한 록스베리 집

작가 아서 밀러가 배우 마릴린 먼로와 결혼한 것은 1956년. 미국에서 가장 지적인 작가와 가장 매력적인 배우의 결합. 아서 밀러는 두 번째 결혼, 마릴린 먼로는 세 번째 결혼.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할리우드의 한 댄스파티. 밀러는 미국 브로드웨이의 연극 이야기를 했다. 먼로가 흥미를 보이자 밀러는 먼로에게 뉴욕에 와서 연기공부를 하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밀러는 먼로를 지적으로 대한 최초의 남자였다. 할리우드에서 주문하는 ‘섹시한 백치미’에 신물이 난 먼로의 마음에 밀러가 들어왔다. 먼로의 지적 호기심이 눈을 떴다.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생활이 끝나자 먼로는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 같은 지적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코네티컷주 록스베리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록스베리 집은 작가가 직접 지었고, 1948년 ‘세일즈맨의 죽음’을 6주 만에 완성한 곳이다. 두 사람은 록스베리와 뉴욕을 오가며 결혼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록스베리 집에서 5년을 살았다.

먼로와 이혼한 밀러는 얼마 뒤 매그넘 소속 사진작가 잉게 모라스와 재혼한다. 모라스와의 결혼 생활도 록스베리 집에서 했다. 모라스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같은 집에서 장장 40년간 살았다.

록스베리의 무엇이 작가를 매료시켰을까. 사랑은 변색되었지만 공간은 그대로였다. 나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2011년 가을, 록스베리로 달리면서 나는 설렘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록스베리의 집들은 숲속에 띄엄띄엄 한 채씩 있었다. 자동차로 한참을 가야 한 집이 겨우 나타났다. 밀러와 먼로가 살던 집은 외견상 평범해 보였다. 내가 찾아갔을 때 집은 비어 있었다. 거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집 앞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거실 창문으로 마당을 보게 되었다. 작은 수영장이 보였고, 그 너머로 탁 트인 숲이 내려다보였다. 끝없는 숲이 발아래 펼쳐졌다. 나는 감탄했다. 마당으로만 나오면 작가는 언제든 사계절의 숲을 만났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숲은 형형색색 바다처럼 출렁였으리라.

2012년 봄, 나는 두 번째로 다시 록스베리로 갔다. 워싱턴으로 출장을 갔다가 취재가 다 끝나고 하루 여유가 생겼다. 나는 뉴욕으로 올라가 다시 차를 대절해 록스베리로 달렸다. 처음 록스베리를 찾았을 때 날이 너무 어두워 아서 밀러의 묘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위대한 작가의 영원한 안식처를 보지 못한 채 책을 마무리한다는 게 도무지 자존심이 허락칠 않았다. 그렇게 찾아간 밀러 묘지 앞에 서자 감격했다.

‘드디어 선생님을 만나는군요. 참 멀리 왔습니다.’

밀러는 앞서 세상을 뜬 잉게 모라스 옆에서 영면중이었다. 밀러의 이름 앞에는 writer라고만 적혀 있다.

록스베리 인구는 2200여명. 이 작은 마을에 문화예술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살았다. 아서 밀러, 잉게 모라스, ‘소피의 선택’의 작가 윌리엄 스타이론, ‘배너티 페어’의 발행인 그레이든 카터, 배우 리처드 위드마크·더스틴 호프만,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 음악가 스티븐 손드하임 같은 사람이 서로의 이웃 주민이었다. 스티븐 손드하임은 아마 아서 밀러와 같은 공간에 묻혔을 것이다.

창조적 에너지는 어디서 샘솟나. 작가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은 사랑과 자연이다. 시골 마을을 거닐면서 비로소 아서 밀러가 왜 그토록 록스베리를 사랑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스필버그의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인해 나는 방구석에서 코네티컷의 록스베리를 다시 여행하는 호사를 누렸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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