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브라이트의 ‘발자취’에서 생략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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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라이트의 ‘발자취’에서 생략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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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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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1937~2022)가 지난 3월23일 세상을 떠났다. 올브라이트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7~2001년 미국 외교를 책임지는 국무장관직을 수행했다.
미디어 마다 올브라이트 발자취 기사를 크게 다뤘다. 미국 국무장관 최초로 2000년 북한을 방문, 김정일을 만나 비핵화 담판을 벌였기 때문이다. 평양 방문 중 그는 금수산 기념궁전에 있는 김일성의 묘를 참배했다. 2003년에 출간한 자서전 ‘마담 새크리터리’에서 그는 금수산 기념궁전을 방문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세계에는 북한보다 더 가난한 곳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 정신의 자발성이 그보다 철저하게 압살된 곳은 없었다…외교상으로 필수적인 듯했으므로 (김일성) 묘를 찾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사람의 추모에 어떤 경의도 바칠 수 없었다.’
이 대목은 19년 전 그의 자서전이 나왔을 때도 발췌 인용되었고, 발자취 기사 대부분에서도 다시 주목받았다. 그는 김일성을 ‘이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타계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한 시점과 절묘하게 겹치면서 그 의미가 둔중하게 다가왔다.
그는 이후 두 권의 책을 더 펴냈다. ‘프라하의 겨울’과 ‘파시즘의 경고’이다. 미디어에서 발췌한 ‘파시즘의 경고’의 한 대목을 보자.
“파시스트는 스스로를 국가 전체, 혹은 집단 전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자이다. 그는 타인의 권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기꺼이 폭력을 동원하고 자신이 가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파시즘의 경고’에서 파시즘의 계승과 그 계승자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보낸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한 달 전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11년 동안 체코에서 경험한 것
발자취 기사들은 올브라이트의 체코 시절을 대체로 두세 문장으로 압축하고 넘어갔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체코 이민자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마리 야나 코르벨로바’이다. 1937년 5월15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1세였던 1948년, 공산 정권을 피해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1937년이면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지 4년이 되던 시점. 유럽 세계는 히틀러의 움직임에 극도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은 불안에 떨었다. 히틀러가 언제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
1년 뒤인 1938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4개국 정상이 뮌헨에 모였다. 4개국 정상은 독일과의 접경 지역인 체코 영토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양도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뮌헨협정이다.
매들린이 두 살 때인 1939년 초, 체코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다. 유대인들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부친은 어떻게 나치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식솔(食率)을 건사할 수 있었을까.
매들린이 태어난 1937년은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자유민주공화국이 된 지 19년째 되던 해.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은 ’마리 야나 코르벨로바‘.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더 태어난다.
아버지 요제프 코르벨(1909~1977)은 체코 건국의 지도자인 토마쉬 마사릭(1850~1937)과 에드바르트 베네시(1884~1948)의 지지자였다. 1937년 외교관인 부친의 임지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주재 체코대사관의 언론담당관. 1939년 3월 체코가 나치에 점령당하자 가족은 망명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네시는 런던에서 체코 망명정부를 세웠고, 지도자가 된다. 코르벨는 런던의 체코 망명정부에서 베네시의 고문으로 일한다. 코르벨 가족이 거처를 마련한 곳은 당시 런던에서 집값이 가장 싼 노팅힐 지역. 1920년대 말, 조지 오웰이 5년간의 경찰 생활을 청산하고 습작을 하며 지냈던 곳이 노팅힐이다.
코르벨 일가는 나치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했지만, 런던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코르벨 일가는 대공습인 블리츠(The Blitz)로부터 살아남아야 했다. 나치 독일은 1940년~1941년 영국에 대공습을 147회 퍼부었는데, 그중 런던에 71회가 집중되었다. 블리츠로 민간인 4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코르벨은 집안에 대형 철제식탁을 사다 두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습에 대비했다. 그는 가족에게 사이렌이 울리면 철제식탁 밑으로 숨는 연습을 시키곤 했다. 철제식탁 밑에서 코르벨 일가는 가까스로 블리츠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녀 매들린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한편 1941년 부모는 유대교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했고, 아이들은 로마 가톨릭 신념으로 길러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가장 먼저 소련군이 프라하에 진주했고, 뒤이어 체코 망명정부가 런던에서 프라하로 귀환한다.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던 체코는 ’패전국 대우‘를 받았다. 체코에 좌우합작 정권이 들어선다. 대통령은 공화주의자 베네시.
코르벨은 유고슬라비아드 주재 체코대사로 임명된다. 유고슬라비아는 이미 공산 정권이 들어선 상태. 3남매를 베오그라드 학교에 보낼 경우 마르크스주의에 전염될 것을 우려한 코르벨는 상당 기간 아이들에게 홈스쿨링(재택교육)을 시킨다. 얼마 후 코르벨는 아이들을 스위스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매들린은 스위스 학교에 다니면서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었고, 이때 이름도 ’마리‘에서 영어식인 ’매들린‘을 바꾼다.
1945년 체코가 패전국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 놓이는 장면은 한반도 상황의 데자뷔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패전국이 된 한국은 38도를 경계로 남북을 미국과 소련이 각각 신탁통치하게 된다. 문제는 남한의 복잡한 정치 상황. 북한의 지령을 받는 좌익이 득세하면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이 난항을 겪는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김구·김규식은 좌우합작 정부를 주장하며 대립한다. 좌익의 반대를 딛고 이승만은 UN 감시하에 자유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해양블록‘에 편입시킨다.
1945년 좌우합작 정권이 세워진 체코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3년간 우익 인사에 대한 테러와 협박이 이어졌다. 3년의 공포정치 끝에 1948년 2월25일, 좌익세력은 우익인사들을 몰아내고 공산 쿠데타를 완성한다. 소련은 체코를 공산화함으로써 ’동구 공산권 블록‘을 완결 짓는다. 하지만 자유 진영은 마지막 남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코가 공산화되자 충격에 빠진다. 동서 냉전의 시작이다.
공산 쿠데타의 성공을 알리는 행사가 1948년 2월25일 구시가광장 골즈킨스키 궁전 발코니에서 행해졌다.(골즈킨스키 궁전은 48년 전 프란츠 카프카가 다닌 김나지움이 있던 곳이다) 구시가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은 공산 정권의 출범에 환호했다. 스무살 대학생 밀란 쿤데라도 군중 틈바구니에서 공산당 지도자 클레멘트 고트발트의 연설을 들으며 박수를 쳤다.
체코에 공산 정권이 들어설 무렵 코르벨 대사는 ’카슈미르 분쟁 해결을 위한 유엔위원회 위원‘으로 카슈미르(인도 북서부에서 파키스탄 북동부에 이르는 지방)에 파견된다. 얼마 후 그는 카슈미르 현지에서 조국이 공산화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그는 현지에서 UN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다. 런던에서 가족과 만난 그는 다른 난민들과 함께 미국 군함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1948년 11월, 코르벨 일가는 뉴욕 앞바다 엘리스(Ellis)섬에 도착한다. 엘리스섬은 ’자유의 여신상‘의 리버티섬 바로 옆에 있는 섬.
코르벨 일가는 엘리스섬에서 망명 신청을 한다. 공산주의를 피해 난민 신세가 된 코르벨 일가. 열두 살 매들린은 아버지 곁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미국은 체코 난민의 망명 신청을 허가했다.
여기서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록펠러재단이 코르벨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덴버 대학은 코르벨에게 국제정치학 교수 자리를 제안했다.(그는 덴버 대학에서 정년퇴직했고, 덴베 대학은 2000년 ’요제프 코르벨 인류애상‘을 제정한다)
열두 살 소녀는 50년 뒤 유엔대사를 거쳐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에 오른다. 국무장관으로서 그는 자신의 조국 체코를 나토(NATO)에 가입시킨다.
올브라이트가 자서전에서 ’김일성의 묘에 어떤 경의도 표할 수 없었다‘고 기술한 배경에 대해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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