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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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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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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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작가가 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과 외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 전자가 절대다수다.
영어 외에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어 습득에 재능을 타고난 이런 사람들조차도 글을 쓸 때는 대개 모국어로 쓴다. 말하는 것과 글 쓰는 것은 다른 영역이어서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1952~)이 최신작 ‘페스트의 밤’을 발표했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건축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2006년부터 주로 뉴욕에 살며 컬럼비아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한다. 대학에서는 물론 영어로 강연한다. 하지만 작품을 쓸 때는 터키어로 쓴다.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평가 받는 세밀화 같은 그의 문학은 모국어로 직조해낸 것이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 의사학술대회에서 ‘천재와 함께 떠나는 프라하 여행’을 강연한 적이 있다. 강연 중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배우 추송웅이 ‘빨간 피터의 고백’을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장기 공연한 적이 있는데, 혹시 이 연극을 본 사람이 있나?”
그러자 60대 의사가 손을 들었다. 그는 수련의 시절 그 연극을 보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오랫동안 프란츠 카프카를 독일 작가로 알고 있었다고.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어찌해서 독일 작가로 잘못 입력되었을까.
그는 프라하 구시가 한복판에서 태어나 반경 1km 안에서 평생을 살았다. 시간적으로 보면,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생(生)을 받아 제국이 해체되고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때 눈을 감았다.
사람의 생애에는 시대적 배경이 수목의 나이테처럼 또렷하게 박인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십대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천신만고 끝에 구시가 한복판에 번듯한 잡화상을 열었다. 헤르만이 태어났을 때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용은 막강했다. 가진 것 배운 것 없이 맨주먹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헤르만은 체득했다. 목에 힘을 주고 살려면 제국의 관료가 되어야 한다.
헤르만은 아들이 태어나자 모든 걸 오스트리아화(化)하기로 결심한다. 아들 이름을 오스트리아제국 황제의 이름을 따 독일식 프란츠(Franz)라고 지었다. 초등학교부터 독일계 학교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독일어 왕립김나지움에 진학한다. 그리고 프라하대학을 거쳐 산업재해보험공단 공무원이 된다.
그는 집에서는 체코어를 사용했지만 학교에서는 독일어로 말하고 썼다. 1924년 죽을 때까지 그는 몇 작품만을 독일어로 발표했을 뿐이다. 프라하에서 그를 소설가로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때 번역가 밀레나 예잔스카가 등장한다. 밀레나는 독일어로 쓰인 카프카의 작품을 체코어로 최초로 번역한다. 카프카가 작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친구 막스 브로트가 그의 사후 미발표 원고를 모아 책으로 출간하면서부터.
하지만 1948년 체코가 공산화되면서 작품들은 곧바로 금서(禁書)로 묶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의 소설에 ‘퇴폐적’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한국 등 자유 세계에서는 자유롭게 읽혔지만 정작 체코에서는 불온한 작품으로 여겨졌다. 이런 과정에서 ‘독일 작가’라는 오해가 생겼다.
밀란 쿤데라가 프랑스어로 쓴 ‘느림’(라 랭튀르)

1995년부터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쿤데라
매년 가을 노벨상 시즌이 되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곤 하는 밀란 쿤데라(1929~). 쿤데라는 체코어와 프랑스어로 글을 쓴 작가다.
쿤데라가 태어난 해를 기억해두자. 뉴욕에서 증시가 폭락하면서 대공황이 시작된 해다. 대공황의 쓰나미가 세계를 덮치자 공산주의 세력이 우후죽순처럼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브르노 출신인 쿤데라는 1948년 열아홉 살에 체코 수도 프라하로 온다. 열아홉, 혁명과 사랑에 맹목적인 나이 아닌가. 열아홉 청년은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그들의 현란한 수사(修辭)에 열광했다. 열혈 공산당원이 되었다. 대학생 쿤데라는 공산주의를 찬미하는 시를 잇달아 썼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기질을 타고난 그는 전체주의 조직 문화에 맞지 않았다. 이후 여러 차례 출당과 복당을 반복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국립영화학교(FAMU) 조교가 된다. 1960년대 들어 그는 시를 접고 희곡에 뛰어들었다. 다시 희곡과 평론을 주유하다 마침내 소설에 닻을 내린다.
1967년 첫 소설 ‘농담’이 나왔다.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그의 문명(文名)이 비로소 자유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벌어지자 그는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가담한다. 하지만 ‘프라하의 봄’이 소련제 탱크의 캐터필러에 짓밟힌 후 그는 완전히 삭제된다. 도서관과 서점에서 그의 책들이 사라졌고, 출판이 금지된다. 작가에게 사형선고였다!
1970년 그는 프랑스의 지방대학으로부터 받은 교환교수 초청장으로 공산정권으로부터 ‘3년 외국 거주’ 허가증을 받는다. 프라하에 모든 재산을 두고 옷가지와 책들만 자동차에 싣고 프랑스로 갔다. 그는 3년 기한이 끝나고서도 체코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그는 파리대학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간다. 망명 후 첫 장편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이 1978년 파리에서 체코어로 출간되었다. 1984년 체코어로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모든 번역에는 언제나 오역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의사가 오진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언제나 서면 인터뷰를 고집했다. 그는 오역의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 직접 프랑스어로 쓰겠노라 결심한다.
그는 1995년에 장편소설 ‘느림’을 프랑스어로 썼다. 프랑스에서 살기 시작한 지 25년 만에 예순여섯의 이방인이 주류의 언어로 작품을 써냈다. 이후 쿤데라는 ‘정체성’, ‘무지’, ‘무의미한 축제’를 모두 프랑스어로 써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포스터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영감을 준 소설
영어영문학과에 다니는 대학생들은 전공 시간에 조시프 콘라드(1857~1924)를 배운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 ‘로드 짐’ 등으로, 콘라드에게는 ‘영어로 글을 쓰는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라는 평이 따라붙는다.
콘라드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영화는 기억한다. 이 영화는 ‘어둠의 심연’에서 소재를 빌려왔다.
콘라드는 스무 살 때까지 영어를 전혀 몰랐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폴란드가 제정러시아 속국이던 시절 1857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반체제 활동을 하던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몸이 약해 학교를 빠지는 날이 많자 외로운 소년은 책을 친구로 삼았다. 특히 항해와 탐험에 관한 책들에 빠져 지냈다.
그는 열일곱 살에 처음 프랑스 배를 탔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과 출발이 비슷하다. 스물네 살이던 1881년 영국 상선으로 갈아 탔다. 이때부터 ‘생존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서서히 운명의 항로가 바뀌어 간다. 영국 상선을 타고 세계 곳곳의 ‘해가 지지 않는’ 영국 식민지들을 돌아다닌다. 선원이 아니면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진기한 깨달음의 연속!
1894년, 그는 출렁이는 바다에서 단단한 육지로 내렸다. 20년 만이다. 서른일곱 살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배운 적도 써 본 적도 글을 쓰기로 한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너무도 많아 도저히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전업 작가로 나서 네 번째로 써낸 소설이 ‘어둠의 심연’(1899)이다. 소설의 배경은 아프리카 콩고. 야만인으로 타락해 살인을 일삼는 유럽인 ‘커츠’를 등장한다. 서슬 퍼런 제국주의의 한복판에서 반제국주의·반인종주의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콘라드의 위대함이 자리잡는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은 그 무대를 베트남전쟁으로 바꿔 원작의 유럽인 ‘커츠’를 미 공수부대 ‘커츠 대령’으로 바꿔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가 폴란드어로 소설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영국 상선을 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가 영국인이었다면 ‘어둠의 심연’ 같은 관점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가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변방의 정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마이너리티 센서빌리티(minority sensibility)다. 그는 영어로 글을 썼지만 그의 작품에는 폴란드 출신이라는 소수자 의식이 나지막하게 깔려 있다. 우미성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는 “외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회의 이방인으로서 느끼고 경험했을 경계인으로의 소외를 주체적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조시프 콘라드, 밀란 쿤데라, 프란츠 카프카. 체코어와 폴란드어라는 비주류 언어권에서 태어났으나 언어의 국경을 넘어 주류 언어를 체득한 작가들. 세 사람의 이름을 동렬(同列)로 세워놓고 보니 뭔가 공통점이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이중문화를 내면화한 작가만이 갖는 신비로운 메타포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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