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자유를 선물한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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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자유를 선물한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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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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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가을, 나는 열흘 동안 미얀마의 수도 양곤을 종횡으로 돌아다녔다. 아웅산묘소 테러사건 20주기를 앞두고 수감 중인 북한 테러범 강민철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였다.

양곤에 머물 때 이방인의 눈에 가장 신기했던 것은 남성들이 입는 치마 ‘론지’였다. 남성 상당수가 전통의상 론지를 입고 다녔다.

호기심에 나도 론지를 입어 보았다. 처음엔 생각보다 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얀마가 발전하려면 론지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교민 사업가의 말에 수긍하게 되었다.

론지는 행동을 크게 제약했다. 기념으로 론지를 하나 사왔지만 지금껏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이미지가 백파이프 연주와 남자들이 입는 치마 ‘킬트’(Kilt)다. 특별한 날에만 입는 킬트는 스코틀랜드인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배우 숀 코너리가 생전에 종종 킬트를 입곤 했다.

무사 정권인 바쿠후(幕府) 시절 일본 남자들도 치마바지를 입었다. 사무라이가 입는 치마바지를 ‘하카마’라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 문화가 사라지면서 하카마도 사라졌다. 지금은 패션의 하나로 하카마가 소비된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무너지자 아래로부터 혁명적 요구들이 솟구쳤다. 그중 하나가 ‘여성에게도 바지를 허용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혁명정부는 전통에 반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여성이 바지를 입을 경우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법이 1800년 11월에 제정되었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바지를 입는 여성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100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승마할 때만 바지가 허용되다

유럽에서 승마는 상류사회의 레저다. 상류사회 여성들도 승마를 할 때 처음에는 치마를 입었다. 그런데 치마를 입고 말을 타보니 너무 불편했다. 자연스럽게 승마바지가 등장한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은 소녀는 7년간 고아원 생활을 한다. 열아홉 살에 고아원을 나온 처녀는 양장점 보조로 취직한다. 프랑스 중부의 소도시 물랭이다.

물랭은 기병 부대가 있어 군인 비율이 높았다. 외모에 자신이 있던 그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운 좋게 음악 카페에 가수로 데뷔한다. 군인들은 그의 외모에 환호했지만 그는 가수로서 한계를 느낀다.

1904년, 부유한 예비역 장교 발장이 그를 자신의 별장에 초대한다. 아마추어 기수(騎手)인 발장의 꿈은 경주대회 입상. 그는 발장에게서 승마를 배운다. 그때 여성용 승마바지를 입었다.

그는 여성용 승마바지의 디자인을 바꿔 일상에서도 입을 수 있는 바지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 바지를 입고 다녔다. 사람들은 바지를 입은 그를 보고 기겁했다. ‘어떻게 여자가 바지를 입고 다니냐?’ 그러거나 말거나. 그를 구속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파리로 올라와 모자 가게를 연다. 모자 가게가 다시 옷 가게로 커진다. 가브리엘 샤넬(1883~1971)이다.

1차세계대전이 터졌다. 죽음을 일상적으로 목도하면서 파리 여성들은 인습(因習)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으로
코코 샤넬. ⓒ 뉴스1
꿈틀거렸다.

유행의 최전선에서 샤넬은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냈다. 샤넬은 치마의 길이를 줄였다. 여성들은 남성의 손을 잡지 않고도 걸어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치렁치렁 바닥에 쓸리던 치마의 단을 과감하게 줄이자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그때부터 신발에 남성들의 눈길이 쏠렸다. 구두가 패션의 영역으로 성큼 들어왔다.

상의도 헐렁하게 디자인했다. 더 이상 잘록한 허리선과 가슴을 풍만하게 강조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번 편안한 옷을 걸쳐본 여성들은 다시는 코르셋을 찾지 않았다. 마침내, 수백년간 여성을 옥죄어온 코르셋이 사라졌다.

샤넬은 모자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넓은 챙을 줄이고 화려한 깃털 장식을 과감하게 없앴다. 단순미를 강조한 모자 디자인을 세상에 내놓자 여성들이 열광했다.

1944년에 나온 영화 ‘녹원의 천사’. 엘리자베스 테일러(1931~2011)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를 최근 강화도 동검도에 있는 DRFA365 예술극장에서 보았다.

이 영화의 원제는 ‘내셔널 벨벳’(National Velvet). 1920년대 영국이 시대 배경이다. 시골 소녀가 남장을 한 채 전영(全英) 승마대회 ‘그랜드 내셔널’에서 극적으로 우승을 한다는 줄거리다.

1920년대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게 보인다. 여성들은 한결같이 치마를 입고 있다. 바지를 입은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모자는 화려한 깃털 장식으로 요란하다. 이 영화는 세계 복식(復飾) 변천사 연구 측면에서도 유용하다.

샤넬이 개발한 바지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인물이 배우 마를렌 디트리히(1901~1992)다. 1932년 베를린에서 데뷔한 그는 할리우드로 건너가 세계적 스타가 된다. 1933년 개리 쿠퍼와 함께 ‘모로코’에 출연하면서 그는 공식 석상에서 과감하게 남성 정장을 입었다.

피임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20세기 중반까지 여성의 삶은 출산과 육아가 전부였다. 아이가 생기는 족족 낳다 보니 8남매, 10남매 출산도 흔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생살을 찢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출산.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가.

아이를 낳으면 낳을수록 여성의 몸은 축난다. 보통 가정에서 식구가 많으면 제대로 된 교육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밥 먹을 ‘입’(口) 하나 덜려고 아이들은 열대엿 살이 넘으면 공장으로 내몰렸다.

도시에는 값싼 미숙련 노동력이 흘러넘쳤다. 유럽과 미국에서 횡행하던 아동 노동 착취는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가능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간호사인 한 여성이 산아제한 운동을 벌인다. 여성 스스로가 피임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임이 불법으로 간주되던 시기에.

마거릿 생어(결혼 전 이름은 마가렛 히긴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마거릿 히긴스(1879~1966). 1879년 미국 뉴욕주 코닝에서 태어난 마거릿은 간호학교를 나와 보건 간호사가 된다.

1902년 윌리엄 생어와 결혼해 3남매를 둔다. 간호사로 일하던 1912년 어느날 마거릿은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낙태를 하려다 잘못돼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온 새디 작스. 마거릿은 죽어가는 새디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한다.

그로부터 4년. 마거릿은 1916년 뉴욕 브루클린에 산아제한진료소를 연다. 그는 빈곤층 여성을 상대로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할 권리를 가져야만 생존율이 높아진다는 점을 설파했다.

브루클린에서 일으킨 산아제한 운동의 깃발은 세계 여성들의 박수를 받으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922년 일본, 중국 등을 방문해 성교육과 피임을 강연했고, 신문에 피임에 관한 글을 썼다. 피임에 관한 팸플릿을 나눠주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그는 인공중절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산아제한과 인공중절의 차이를 설명해 나갔다.

여성에게 도움이 되려면 피임약 개발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생화학자에게 피임약 개발을 권유하며 연구 자금을 지원한다. 그렇게 경구피임약이 개발되었다. 마침내, 1929년 피임이 합법화되었다. 1952년 국제가족계획연맹이 설립된다. 마거릿은 초대 회장으로 활동한다.

여성이 사회활동에 참여하면서 세상이 달라졌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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