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트 모자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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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트 모자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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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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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작가로 독립하고 나서 야심차게 도전해 본 게 있다. 펠트 모자다. 펠트 모자를 멋스럽게 쓰고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몇 번 펠트 모자를 쓰고 다니다가 결국 포기했다.

내 얼굴형이 펠트 모자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서다. 펠트 모자는 갸름한 얼굴형에 어울린다. 턱이 길고 길쭉한 얼굴형에 맞는 게 펠트 모자다. 나는 두상이 갸름한 형이 아닌데다, 나이가 들면서 나잇살이 붙어 얼굴이 둥글둥글해져 가는 중이다.

메콩강을 건너는 백인 소녀
 
펠트 모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우연히 발견하면 다시 쳐다보게 된다.

내 인생에서 펠트 모자의 여성이 가장 아름답게 다가온 것은 1992년 영화 ‘연인’에서였다. 프랑스 소설가 마그리뜨 뒤라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1920년대 프랑스 식민지이던 베트남 사이공. 메콩강을 오가며 사람과 자동차를 싣고 부리는 여객선이 나온다. 그 배 위에 얇은 민소매 원피스에 펠트 모자를 쓴 백인 소녀가 뱃전에서 금빛으로 출렁이는 메콩강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갈색 바탕에 검은색 띠를 두른 펠트 모자 아래로 양 갈래 머리가 목덜미에 스친다. 여객선에는 트럭과 리무진이 실려 있다. 리무진 뒷자리에 아이보리색 양복을 입은 동양 남자가 앉아 있다.

유럽풍 양복을 입은 남자가 펠트 모자의 소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이윽고 남자가 리무진에서 내려 천천히 펠트 모자의 소녀에게 다가간다. 남자가 담배를 권하며 말을 걸어본다. 소녀가 거절한다. 남자는 한동안 강물을 바라본다.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사택에 사는 여선생의 딸입니다.”
 
그러자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파리에서 공부하다 돌아왔으며, 아버지는 베트남의 개인 소유 식민지 땅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계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앞으로 나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배가 선착장에 이르렀을 때 남자가 제안한다. “사이공에 있는 아가씨 집까지 데려다 드리는 것을 허락해주겠소?”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의 리무진 승용차 안으로 들어간다. 한국에서 펠트 모자가 유행한 것은 아마도 ‘연인’ 주인공의 영향이 컸으리라.

 
백남준에 큰 영향을 준 요셉 보이스
 
얼마 전 강남 메리어트호텔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 센트럴터미널 광장을 지날 때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다가 걸음을 멈춘 채 어떤 20대 여성을 한참 동안 쳐다본 적이 있다. 티셔츠에 ‘Joseph Beuys’가 큰 글씨로 선명했다.
 
요셉 보이스(1921~1986). 독일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아티스트.
 
Joseph Beuys 알파벳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 짧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지만 생각했다.
 
저 사람은 요셉 보이스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아니면 독일 뒤셀도르프대학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거나. 뜻도 모른 채 그냥 영문 알파벳이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은 ‘절대’ 아닐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요셉 보이스를 좋아하시는군요”라고 말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요셉 보이스를 미디어아트 창시자 백남준(1932~2006)을 연구하면서 알게 됐다. ‘세계인문여행’에서도 서너 번 언급했다. 백남준은 1950년대 후반 독일에서 유학할 때 우연히 요셉 보이스를 만났다.
 
백남준보다 열한 살 연장자였지만 두 사람은 예술적 동지로서 평생을 가는 우정을 나눈다. 백남준이 미디어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는 데 요셉 보이스가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요셉 보이스가 1986년 타계했다. 백남준은 4년 뒤인 1990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그를 추모하는 진홋굿 퍼포먼스 ‘늑대 걸음으로’를 선보였다.뒤셀도르프대학 교수였던 요셉 보이스는 샤머니즘을 배척하지 않고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사람이다. 백남준이 현대화랑에서 진혼굿을 펼친 것은 샤머니즘을 새롭게 해석한 보이스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요셉 보이스는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 평생 펠트 모자를 쓰고 다녔다. 식사할 때도 그랬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사진을 보면 모두 다 펠트 모자를 쓴 모습뿐이다.
 
보이스가 언제 무엇을 계기로 모자를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쨌든, 펠트 모자는 요셉 보이스의 시그니처다. 펠트 모자를 벗은 요셉 보이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주름살이 아름다웠던 가수 레너드 코언
 
내가 과거에 좋아했고, 죽고 난 뒤에도 여전히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레너드 코언(1934~2016)이다. 그가 2016년 11월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주간조선에 특별히 추도사를 쓰기도 했다.
 
미국 뉴욕에서 주로 활동한 코언이지만 그에게서는 미국 가수와 다른, 형언하기 힘든 어떤 소울이 풍긴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태어나고 자란 유대계 프랑코폰이어서 그렇다. 명문 맥길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그는 가수가 되기 전 시와 소설로 먼저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를 알게 된 것은 ‘I am your man’(아이 엠 유어 맨)을 통해서다. 그러나 이 노래 보다 더 좋아하게 된 노래가 ‘Dance me to the end of love’(댄스 미 투 더 엔드 오브 러브)다. 전주와 간주부터 에로티시즘의 극치다.
 
코언은 멋지게 늙는 사람의 심볼이다.
 
코언은 늙음만이 주는 매력은 중절모, 은발, 깊은 주름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는 노래가 끝나면 언제나 중절모를 벗어 가슴에 대고 관객에게 인사를 한다.
 
중절모가 가장 잘 어울리는 가수 레너드 코언. 깊게 주름진 노년의 남자가 물광 피부의 아이돌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남자. 노년의 코언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멋지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포인트가 중절모였다.

 
볼살리노 페도라를 쓴 사람들
 
모자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오브제라는 말이 있다. 재킷과 바지는 사람이 입어야만 비로소 제 모양이 드러난다. 하지만 모자는 그 자체로 모자다. 모자걸이에 걸어놓아도, 탁자에 놓아도 여전히 모자다.
 
중절모를 만드는 회사 중 가장 유명한 곳이 이탈리아 볼살리노. 1857년 창립된 볼살리노 사가 생산하는 모자 브랜드가 페도라(fedora)다. 세월을 거치면서 페도라는 중절모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20세기를 살다 간 세계적 명사 중 페도라 한두 개를 갖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다.
 
모자로 남자의 50년 생애를 표현한 영화가 있다. 저 유명한 ‘Once upon a time in America’(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주인공 누들스가 10대에 쓰고 다니던 모자는 뉴스보이 캡. 그러나 세월의 파도와 바람을 딛고 노년이 된 누들스는 페도라를 쓰고 나온다.
 
중절모 하면 또 생각나는 사람이 험프리 보가트다. 영화 ‘카사블랑’의 험프리 보카트는 중절모를 빼면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보카트가 쓰고 나온 모자가 볼살리노사의 페도라다.
 
국내에도 오래 전에 볼살리노 매장이 문을 연 적이 있다. 롯데호텔에서다. 그러나 워낙 고가제품이다 보니 고객이 없어 오래가지 못하고 폐업했다. 디자이너인 지인은 폐업하는 볼살리노 가게에서 싼값에 페도라를 사서 쓰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중절모를 멋지게 쓴 사람이 한 사람 더 생각난다. 마이클 잭슨이다. ‘빌리진’을 부를 때 화이트 페도라를 쓰곤 했다. 실제로 마이클 잭슨은 공식 석상에서 대부분 모자를 쓰고 다녔다. 토니상을 4개나 받은 뮤지컬 ‘MJ’ 포스터에도 모자가 강조된다.
 
펠트 모자가 가장 어울리는 직업군이 있다. 재즈 뮤지션이다. 이 문장을 쓰고 보니 불현듯, 뉴욕 맨해튼 재즈클럽 빌리지 뱅가드가 떠오른다. 자욱한 담배 연기로 눈이 몹시 따가웠다. 재즈 곡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티스트의 펠트 모자가 눈에 선하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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