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병이 탄생시킨 불후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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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병이 탄생시킨 불후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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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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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시리즈의 마지막 권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2020)을 쓰면서 인물 선정에서 가장 고심했던 분야가 회화였다. 최종적으로 압축된 인물은 두 사람. 김환기와 박수근. 두 사람 중 누굴 선택해야 할까.

그러던 중 이어령 선생(1934~2022)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생의 결정적인 조언을 받아들여 박수근을 택했다. 김환기가 탈락한 이유 중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그가 너무 일찍 한국을 떠나 서울에 그의 흔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딸 셋을 둔 이혼남 김환기(1913~1974)가 이상(李箱)과 사별한 변동림과 결혼한 것은 1944년. 비범한 변동림은 남편의 작품이 외국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누군가 그 길을 뚫어줄 수만 있다면 남편이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변동림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맡기로 한다. 1955년 남편의 작품 슬라이드를 들고 먼저 파리로 갔다. 프랑스인 대부분이 한국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때다. 이후 그는 남편의 성을 따라 김향안(1916~2004)이 된다.

파리에서 프랑스어와 미술사를 공부하며 김향안은 남편이 사용할 아틀리에를 구했다. 그리고 남편을 오게 했다. 김환기는, 그렇게 매니저이자 아내인 김향안의 도움으로 세계 미술계에 진출했다. 마흔두 살에 고국을 떠난 김환기는 20년간 뉴욕과 파리에서 활동하다 1974년 뉴욕에서 눈을 감았다.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은 김환기의 대표작 ‘우주’를 안다. 한국 미술품 낙찰가 최고(132억원)를 기록한 작품. ‘우주’는 1971년에 완성한 푸른색 전면 점화(點畵)다. 김환기가 고국의 하늘을 그리며 그린 작품이 ‘우주’다.

그가 태를 묻은 곳은 전남 신안 안좌도. 미술평론가들은 김환기의 점화 작업을 ‘그리움의 점화 작업’이라 평한다. 사람 나이 마흔 넘어 고국을 떠나면 누구든 향수병에 걸려 힘들어진다. ‘우주’를 그리면서 화가는 이런 글을 남겼다.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고 했다. 뻐꾸기의 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 앞바다 돗섬에 보리가 누르렀다고 한다. 생각나는 것이 많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김환기의 작품 중에 1961년 작 ‘여름 달밤’이 있다. 이 작품은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의 달밤을 떠올리며 그린 것이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그는 안좌도의 산, 달, 나무, 구름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일리야 레핀의 자화상. /사진출처=위키피디아
△ 레핀의 고향 우크라이나 추구예프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1844~1930). 화가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의 작품은 한 번만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볼가 강의 뱃사람들’ ‘자포르쥐에 카자크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이반 뇌제, 자신의 아들을 죽이다’….

레핀은 1844년 우크라이나 소도시 추쿠예프에 태를 묻었다. 농노에서 농민이 된 아버지는 농사를 그만두고 말 장사를 시작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던 레핀은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정규 미술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우연히 유명한 이콘(icon·聖?) 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길이 열리게 된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서유럽 회화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왕립 미술아카데미.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하는 데다 졸업과 동시에 직업화가 자격증을 주었다.

화가 지망생들이 선망하는 학교였다. 레핀은 1864년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에게 벼락같은 성공을 안겨준 작품이 아카데미 학생 때 그리기 시작해 스물아홉에 완성한 ‘볼가 강의 뱃사람들’(1870~1873)이다. 이후 그는 그리는 그림마다 박수를 받았다. 1884년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를 발표하자 러시아 화단은 경악했다.

1899년 성공의 정점에서 그는 핀란드만과 가까운 숲속으로 거처를 옮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가에서 47㎞ 떨어진 곳에 집을 지었다. 집 이름을 ‘페트나이’라고 명명한다. 러시아어로 ‘고향 집’이라는 뜻이다.

위대한 화가로 칭송받으면서도 레핀은 오매불망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함께 고향 추구예프를 생각 하며 숲속 곳곳을 고향 마을처럼 꾸몄다. 정원의 경사진 언덕을 화가는 ‘추구예프 언덕’이라고 불렀다.

페트나이는 제2의 고향이면서 마음의 고향이었다. 화가는 페트나이를 일주일에 한 번씩 개방해 손님을 맞았다. 나머지 시간은 작업에 매달렸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의 열정이 식지 않은 것은 문을 열면 고향의 숲 같은 페트나이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레핀은 눈을 감으면서 페트나이 숲속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고, ‘고향 집’에서 영면에 들었다. 페트나이의 정원을 산책하면서 나는 걸음걸음 레핀이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안토닌 드보르작. /사진출처=위키피디아
△ 뉴욕에서 탄생한 ‘신세계교향곡’

뉴욕필이 외국 순회공연을 할 때 레퍼토리 상위에 들어가는 게 ‘신세계 교향곡’이다. 안토닌 드보르작(1841~1904)의 제9번 교향곡의 부제가 ‘신세계로부터’다. 알려진 대로 ‘신세계교향곡’은 드보르작이 미국 뉴욕에 체류(1892~1895)할 때 쓰인 곡이다.

작곡가는 1891년 자네트 서버 여사로부터 뉴욕 국립음악원 원장직을 맡아달라는 초대를 받고도 오랜 기간 망설였다. 중년의 나이에 외국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작곡가는 나이 쉰한 살 때 미국행을 결단했다. 고심 끝에 수락한 것은 연봉을 포함한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신대륙의 용틀임과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광도 잠깐. 작곡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향수병에 빠졌다. 보헤미안의 집단 부락 아이오와주 스필빌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했지만 향수병은 가라앉지 않았다.

미국 생활 3년째가 되면서는 더욱 힘들었다. 고향 흙냄새가 그리워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4년 계약을 했었지만 서버 여사에 보헤미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결국 3년만인 1895년 보헤미아로 돌아간다.

‘신세계 교향곡’은 1894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초연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교향곡 2악장의 주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2악장 라르고(largo)를 들어보라. 누구든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기억 속의 고향이 강 안개처럼 떠오른다.

잉글리시 호른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향수를 자극한다. 타향살이에 지친 이들은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드보르작이 보헤미아를 떠나지 않았다면 9번 교향곡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태어난 곳에서 그대로 사는 사람은 고향의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 대도시에서 나서 사는 사람은 연어의 회귀(回歸) 같은 명절의 대이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고향은, 이향(離鄕)할 때 그곳은 비로소 고향(故鄕)이 된다.

우리는 왜 열 시간 넘게 차를 몰고 고향을 찾아가나. 실향민은 왜 오두산 전망대에서 북녘의 산하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나. 그곳에 어린 시절의 기억과 시간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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