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고향에선 논에 물을 빼면 가을이 왔다. 추수가 끝난 논 귀퉁이의 웅덩이를 펐다. 양철통에 구멍을 뚫고 물 먹인 새끼줄을 꿰어 두레박을 만들었다. 구덩이 양편에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물을 퍼 올리면 가끔 미꾸라지도 함께 밑동만 남은 논바닥에 나뒹굴었다. 종아리만큼 물이 남았을 때 형제는 성긴 싸리나무 소쿠리에 진흙 웅덩이를 욱여넣었다. 살 올라 누른 미꾸라지가 바글바글했다.
백동 대야에 미꾸라지를 옮겨 담고 그 위로 왕소금과 호박잎을 넣으면 미꾸라지는 서로 몸을 비비며 진액을 토해냈고 점점 풀이 죽었다. 삶은 미꾸라지는 어레미에 올려놓고 물을 부어가며 여러 번 걸러 내렸다. 살을 발라 국물을 만들고 걸러진 뼈는 돌절구에다 잘근잘근 찧어 물을 더했다. 배추, 무청 시래기, 토란대나물이며 대파, 호박 등 한 밭뙈기의 채소를 숭덩숭덩 썰어 솥 안에 넣었다. 가마솥은 허연 숨을 푹푹 내쉬었고 제 식탐에 못 이겨 굵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한여름 내 둥글게 말려 흙벽에 삐딱하게 기대 졸던 멍석이 모처럼 사랑마당에 펼쳐졌다. 집안 어른들의 누룩 냄새에 취해 불그레해진 열없는 농담들이 쪽문을 넘어 안마당으로 넘나들었다. 사랑마당에 둘러앉은 할아버지와 아재들의 밥상 추발에 추어탕 건더기가 넘치게 담기고 흰쌀밥이 고봉으로 내어졌다. 안채 마당엔 멀건 국물에 눌은밥 몇 숟가락이 말아졌지만, 초저녁 시골 동네는 한 식구가 되었다. 담장 밖으로 울긋불긋 배꼽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는 일찌감치 나온 별들을 놀라게 했다.
유년의 가을은 배꼽마당으로부터 왔다. 할아버지의 그 할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은 당산나무 우듬지엔 때 묻은 유화처럼 볏짚 둥지가 지어져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보채는 새끼의 먹이를 나르느라 어미 새의 달음질은 가을 해에 바빴다. 팽나무는 수백 년 세월의 외면을 견딜 수 없어 갈라지고 터진 껍질을 비듬처럼 털어냈고, 검게 썩어 마른 속대에서 곤충들은 끈덕지게 생을 이어갔다. 가을 햇살과 무심한 구름은 빛과 그늘로 교차하여 팽나무 빈집 속을 제집인 양 들락거렸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 노랗게 빨갛게 물든 나뭇잎처럼 탁주 한 사발에 단풍 같은 얼굴로 어깨춤을 추던 할아버지. 배꼽마당의 가을은 분주하고 풍요로웠다.
그해 추수를 끝낸 할아버지는 마당 한가운데 노적가리를 쌓아놓고 “엄마야, 엄마야, 울엄마야” 아기처럼 엄마를 부르다 그예 가을을 따라 먼 길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닥나무 삶아서 닥종이 만드느라 지문이 닳아서 알아볼 수 없었다. 선선했던 바람이 그날따라 매섭고 세차게 불었다. 생전에 당신이 좋아했던 닥종이로 접은 하얀 꽃상여로 마뜩하게 차려입고 배꼽마당에 들러 잠시 쉬었다가 상두꾼의 상엿소리 따라 구절초 만발한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할아버지의 산집 황토 봉분 두드리던 그 가을, 산과 들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고 아버지의 눈시울은 인주보다도 붉었다.
들판에 핀 쑥부쟁이 얼굴을 보면 그리움이 파노라마처럼 밀려온다. 꽃잎 찧어 밥을 짓고 사금파리로 소꿉을 살았던 옛 동무들, 눈을 감고 심호흡하면 왁자그르르 조각보 같은 기억들이 보랏빛 들꽃으로 겹친다. 꽃차를 좋아해서 해마다 이맘때면 들국화로 차를 덖는다. 찌고 말리기를 여러 차례, 다관에 우려져 다시 핀 꽃은 따사한 수색과 함께 퇴고한 문장 같은 향이 난다. 들꽃 향기에 서성이는 그리움은 자꾸만 지워져 가는 시간을 붙들고 싶은 기억의 단상들이다.
흔히 가을은 중년의 계절이라 한다. 푸릇한 청춘을 거치고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과 온갖 비바람을 견뎌내고 단풍으로 물든 가을, 인생 후반을 꿈꾸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고즈넉한 산사를 꽃물결로 붉게 수놓으며 오가는 발길을 붙잡는 꽃무릇의 향연, 가을이 깊어지면서 다시 잎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신록과 녹음을 자랑삼던 가로수가 제 몸의 일부였던 잎을 떨구고 겨울을 채비하는 것처럼 중년은 남은 인생을 새롭게 준비하는 시기일 것이다.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흑백필름의 가을 단상, 배꼽마당에서 공깃돌 하던 아이는 내일모레 육십갑자가 민망하게 또 금추를 맞이한다. 산국과 감국, 쑥부쟁이와 구절초, 벌개미취, 코스모스 등이 산과 들을 화폭 삼아 저마다의 색을 풀어놓는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도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든 이파리를 자꾸만 내려놓는다. 은발의 억새 위로 석양이 길게 누워 잠시 머무는 가을 행간에 그리움이 남아 밑줄 하나 보탠다.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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