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신라를 담다
  • 경북도민일보
옛 신라를 담다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22.11.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빛의 스펙트럼이다. 까치발로 지나가는 초저녁 바람에 불빛들이 자진모리장단으로 춤을 춘다. 강물에 거꾸로 비친 밤의 월정교에 현기증이 인다. 강둑길을 따라 코스모스가 어둠을 안고 살랑거린다. 월정교 아래를 무심히 혼잣말처럼 흘러간 강물은 신라 천 년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품고 길을 만들며 나아갔으리라.

경주 교동에 있는 월정교는 월성의 남쪽 절벽을 끼고 흐르는 강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 교량橋梁으로 근래 복원된 다리이다. 교각과 다리 양쪽에 문루門樓와 지붕이 있는 목조 건축물인 월정교는 신라의 월성과 남산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경주남산은 부처님의 땅으로 여겨져 왕궁에서 행차하는 일이 잦았고, 이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교량을 왕과 왕족 그리고 허락된 신라 귀족만이 말과 가마를 타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월정교 다리 위를 거닐던 달빛이 묵란墨蘭 한 점을 슬며시 그려놓고 강물로 내려선다.

월정교에서 서쪽으로 조금 거슬러 오르면 남편을 전장에서 잃고 청상과부가 된 요석과 원효대사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교柳橋가 흔적으로 남아있다. 원효가 다리를 건너다가 강에 빠져 옷이 젖었고 일정한 거처가 없던 원효가 요석궁에 머물게 되면서 둘 사이에 신라의 기둥이 된 설총이 태어났다. 승려 신분의 원효가 진골 귀족인 요석공주를 만나려고 다리에서 일부러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그의 기행으로 보아 그럴 것도 같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유교 서쪽으로 ‘효불효교’라 불리는 징검다리가 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된 어머니가 마음에 품은 남자를 만나러 밤마다 차가운 개울을 건너는 모습이 안타까워 자식들이 놓아준 징검다리. 어머니를 위한 마음은 효이나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면 불효라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손수 징검다리를 놓았던 아들과 그 다리를 건넜을 어머니의 애달픈 심정을 헤아리듯 징검돌은 속이 환히 보이는 맑은 강물에 행간 없이 앉아있다. 강물에 잠겨 졸던 별빛이 바람에 화들짝 깨어난다. 별 하나 긴꼬리를 달고 서쪽 하늘을 가로질러 오릉으로 숨어든다.

강 건너편 5개의 높은 봉분은 여전히 주인이 살아있는 것처럼 세도가 당당하다. 봄밤에 하얀 목련 꽃잎이 눈물처럼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던 오릉. 고래古來의 시간을 묻은 무덤은 한여름의 태산 같은 욕망을 송림 속에 감추고 있다. 오릉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그 부인인 알영부인, 남해 차차웅과 유리 이사금, 그리고 파사 이사금의 능이라고 전해진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승천한 후 이레 만에 떨어지고 5개 능으로 매장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오릉은 신라의 조락
殂落을 간직하고 박제되어 천 년을 건너온 푸른 왕국이다.

경주에는 역대 신라 왕들의 무덤이 여러 기가 있다. 천마총에는 국보 제188호로 지정된 신라 시대 금관과 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인 자작나무껍질을 겹쳐 누빈 위에 천마도장니 그림이 출토되었다. 신라의 고분 중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은 금제 장신구의 유물과 곡옥曲玉 등 구슬류가 부장되어 있어, 그 후 신라 고분이 무수히 발굴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삼릉과 무열왕릉, 괘릉, 선덕여왕릉, 문무대왕릉 등 어쩌면 땅 위의 신라보다 땅속 신라가 더 넓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금관총을 바로 옆에 끼고 있었다. 그곳은 담이었고 정원이었다. 어쩌다 엄마에게 걱정이라도 들을라치면 무임 승차하는 노을처럼 금관총에 올랐다. 할머니의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의 슬픈 주인공이 되어 마음이 젖도록 훌쩍거렸다. 석양이 서산에 길게 눕고 어둠이 발뒤꿈치로 슬며시 따라오면 무섬증에 미끄러지듯 내려와 엄마의 치맛자락에 숨었다. 나의 유년 시절 금관총은 친구들과의 놀이터였고 생각을 숨기는 아지트였다.

담이 없는 박물관 경주의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 신라 왕성인 김알지의 탄강誕降 전설을 품은 계림鷄林이 있다. 계림은 숲에서 닭이 울었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후에 국명國名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계림 숲에는 왕버들과 느티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등 백여 그루의 고목이 옛 모습 그대로 울창하다. 그중에서도 천삼백 년 세월을 견딘 회화나무가 계림정을 지키고 있다. 홰나무가 담고 있는 신라의 시간은 어쩌면 몸부림의 초상이 아니었을까. 검게 뒤틀린 나무는 썩어서 뭉그러진 억겁의 생각을 게우고 비워냈다. 숲을 지키며 솟구치던 늑골은 껍데기만 둘렀고 감출 수 없는 검은 속살은 지나온 시간만큼 드러나 민망하기 그지없다. 뒤틀리고 기운 허리를 쇠지팡이 짚어 부여잡고 작은 씨앗들 단단히 움켜쥔 홰나무, 기지개 같은 날개 퍼덕이며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 기다리는 것이리라.

갈바람도 발꿈치 들고 지나가는 황룡사지 빈터, 풀벌레 소리에 신열을 앓는 별들이 서성서성 흔들린다. 겹겹의 달무리에 가린 하현달이 저물어 가던 한 왕조에 꿈을 펼치지 못하고 가려져 있어야 했던 고운孤雲선생 같아서 가슴에 허기가 진다. 물기 머금은 푸른 달빛 아래 망초꽃이 지천이다. 꽃 이름에 얽힌 전설이 서럽다. 나라가 망했을 때도 무람없이 온 산천에 피었다 하여 ‘망할 놈의 풀’이라고 천대받았다 하니 신라의 땅 황룡사지에 소금별로 쏟아져 내린 망초의 설움이 바람 끝에 시리다.

신라를 담은 시간이 시나브로 저물어 간다. 황금 정원의 풀꽃들이 곡예 같은 춤을 추는 월성의 가을밤은 사람과 꽃의 노래로 왁자하다. 땅속에 고이 잠들었던 옛 신라의 시간은 현재의 우리와 숨 쉬며 공존하는 문화유산이다. 또한 다가오는 천년을 새롭게 써 가야 할 텍스트의 물길이 아닐까 싶다.

옛 신라의 밤하늘에 은하銀河가 흐른다. 유유히. 김지희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