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 꺼지면 어둠 속에서 비로소 먼 곳까지 사위가 밝아진다. 잠깐의 암전을 견디면 막막함은 고요함으로 바뀌고, 깊고 은근한 시선으로 빛에 가려진 곳에 시선을 던지게 된다. 단순히 찬 물을 끼얹어 상황을 일순 정지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복잡 미묘하게 엉겨들던 순간이 드라마틱하게 반전하는 것이 묘미다. 꼿꼿하게 타오르는 빛과 주변의 어둠을 삼키는 그림자의 팀플레이, 이것이 진짜 하이라이트다. 이 둘은 잠깐의 암전만으로도 오롯이 그 서사를 드러낸다. 빛은 반드시 어둠으로서 그 생명력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밝히는 빛과 지키는 빛의 하이라이트를 극대화시킨 건 단연코 이번 카타르월드컵에서 우승컵을 거머쥔 아르헨티나의 여정이었다. 모든 스포츠에는 드라마가 있다지만 이번 월드컵은 스포츠로는 올림픽을 능가하는 열기가 이어졌고 페스티벌로는 다채로운 이벤트가 폭죽처럼 터졌다. 이 가운데 19일 결승전은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축구의 신이자 불멸의 빛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팀 아르헨티나’는 메시를 위한 공공연한 사랑과 존경을 숨기지 않아왔다. 이날 팀은 각각 최고치의 역량을 모두 쏟아 붓는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빛을 지키는 감격적인 하이라이트를 완성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를 중심으로 한 호흡으로 거친 사랑고백을 하는 키커들을 보면서 내 나라 내 동포도 아닌데 심장이 터질 뻔 했다.
우리나라에도 동포청년을 밝히는 하이라이터가 있다. JTBC ‘재벌집 막내아들’ 속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오세현 대표(박혁권 분)다. 드라마는 재벌가 비서실장이던 윤현우가 의문의 살인사건으로 재벌가 3세 진도준(송중기 분)로 환생해 벌어지는 치밀한 복수극이다.
투자전문가 오세현은 드라마의 주요 쟁점인 순양그룹 상속전쟁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진도준이 도장깨기하듯 상속자들을 쳐낼 때마다 잘 벼른 칼날을 쥐어준다. 미국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 오세현은 진도준을 ‘동포청년’이라 부르는데, 역사적 사건마다 예언자다운 묘수를 두는 진도준의 전생을 그는 알 리 없다.
‘환생’이라는 드라마틱한 키워드, 유력 재벌가를 연상케 하는 기시감, 주인공의 돌파력 등 잘 짜인 얼개 위에 오세현은 드라마의 긴장구도를 더욱 촘촘하게 만든다. 진도준의 하이라이터이지만 개인 진도준의 고민에는 관심이 없으며 자신만만하고 냉정한 사업가의 면모도 갖춘,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다층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떠올려보니 촛불을 꺼보라는 말을 들었을 당시의 나는 천둥벌거숭이 같았다. 주변을 챙기지 못하고 늘 바빴다. 시간에 빚진 채 삐죽한 솟을 대문처럼 휘적휘적 정신없이 다녔다. 그렇게 지내야 했던 까닭이 뭐였을까.
첫째는 나를 믿지 못했다. 나를 지켜주는, 내 그늘에 가려있는 애틋하고 고마운 하이라이터가 있을 것을 알지 못했다. 나를 빛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으니 당연했다. 우리는 누구나 가장 밝은 빛이기도 가장 충직한 하이라이터이기도 하다. 오롯이 빛나봐야 소진한 뒤의 고요를 즐길 수 있다. 12월이 지나간다. 나를 비추는 사람들, 내가 지키는 사람들과 어깨를 걸고 둘러앉아 다정하게 촛불을 켤 시간이다.
안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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