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의 ‘정점’
  • 뉴스1
혼밥의 ‘정점’
  • 뉴스1
  • 승인 2023.03.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은영의 쫌아는 언니] 혼밥의 ‘정점’
끼니를 해먹는 것이 힘에 부칠 때면 모 출판사 편집장 L씨의 말이 떠오른다.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되든 거렁뱅이가 되든 하여간 백수로 살겠다고 했을 때였다. 그녀의 만류는 염려를 넘어 협박에 가까웠다.

작가님, 회사 그만두면 굶어죽을지도 몰라요!

내 손으로 밥도 못 차려먹는 천하의 게으름뱅이로 보았나 아니면 궤도를 이탈한 삶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는 경고였을까. 둘 다일 수도 있고 다른 속뜻이 더 있었을 수도 있는데 하여간 나는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요? 하하하 했었다. 그런데 프리랜서 십년차로서 오늘처럼 죽어라 밥 해먹기 싫을 때 그녀의 혜안에 통탄을 안 할 수 없다.

그녀에 따르면 내가 요리를 좋아하든 말든 살림본능이 있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즉, 내가 어떤 인간인가보다 내가 차려줘야 하거나 나를 차려줄 사람이 없는 싱글의 라이프스타일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사와 생존을 가르는 단 하나의 치트키였음은 두 말이 필요 없다.

간단하다. 집에 누가 온다고 가장하자. 깨끗한 컵에 믹스커피라도 내놓게 된다. 그런데 그가 사흘을 묵게 됐다. 매식과 배달을 포함해 하루 한 끼 이상 함께 먹어야 한다. 상대를 신경 쓰면서 나도 먹게 되니 사흘 동안 내 생존도 보장된다. 어쩌다보니 그와 평생 살게 됐다. 나중에야 각방에 혼밥에 각자도생한다 쳐도 한동안 마주앉는 밥상의 루틴이 형성된다. 둘이서 짝짜꿍 하는 사이 꼬물꼬물 아이가 태어난다. 이때부터는 먹이랴 애태우랴 온통 아이 먹는 것에 신경이 가있어서 굶어죽으려야 죽을 수가 없다. 아시는 바대로.

의식주 가운데 의무와 책임이 결여됐을 때 가장 빠르게 본능에 무너지는 것이 식생활이다. 먹는 일이야말로 개인의 생활(내 경우 생존)에 밀접하게 영향을 주면서 그의 내면을 드러낸다. 누구와 어디서 먹느냐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가 결정된다. 또한 음악이나 옷차림, 대화주제와 이후 관계의 향방까지도 한 끼의 식탁에서 주요하게 고려된다. 먹는 일이 이토록 정치적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개인적이어서다. 점심메뉴부터 친구와의 저녁모임까지 업무를 제외한 하루 중 대부분의 고민은 바로 ‘누구와 뭘 먹느냐’다.

나는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지 않은 내 집에서 자발적 식객으로 산다. 그것은 하루에 반드시 두 끼 이상을 먹지 않아도 뭐랄 사람이 없는, 적막한 자유가 보장된다는 뜻이다. 식탐이 없는 만큼 창의성도 없어서 소비기한에 임박한 것들을 최소한의 공정으로 먹는데도 먹고 치우다보면 하루치 피로가 몰려온다.

무엇보다 나의 허를 찌르는 것은 고요의 역습이다. TV, 휴대폰, 태블릿 등등과 함께 떠들썩한 대신 정서가 없다. 마주앉아 상대의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고개 들어 표정을 지을 일이 없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감각과 정서가 결여된 혼자의 식탁은 씹는 행위의 반복만 있다. 그래서 얼굴은 물론 마음에도 주름을 만든다.

L씨의 말처럼 의무적으로라도 집 밖에 나와야 아사를 면하는 건 아니겠지만 혼자의 집밥은 확실히 끼니의 기능을 생존형으로 바꿔놓는다. 세상 좀 살아봤다고 눈치는 있어서 먹는 일과 사는 일이 분리될 수 없음을 나도 알고 있다. 한쪽이 즐거워야 다른 한 쪽도 신명이 난다. 챙겨 먹는 일이 고단한 이유는 어딘가의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어서다. 그럼 어디, 먹는 일에 신명을 내볼까. 재미가 들리면 주름살 펴지도록 웃으면서 먹겠지.

오늘도 내 점심은 최소 공정의 결과물로서 닭고기 스튜다. 토마토와 당근 등 자투리 채소와 닭가슴살을 냄비에 때려 넣고 끓이는 중인데 메뉴 하나를 추가해볼까. 냉동실 어딘가에 식빵이 있을 텐데… 그걸 버터에 녹여서… 이건 다음에 할까. 벌써 피로해지는걸. 안은영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