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말하는 대로’
  • 경북도민일보
인생은 ‘말하는 대로’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23.0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작 이만치 살아보고 입방정을 떨자면 인생은 ‘말하는 대로’가 맞다. 나처럼 아무 말이나 그것이 칼인지 똥인지 모르고 뱉어대는 무지렁이도 가끔은 저도 모르게 제 인생에 거름이 되는 말을 주워섬긴다. 먼 별에서 송신한 노래 또는 잠든 입에서 새어나온 방언처럼 제멋대로 끼적인 글과 말이 놀랍게도 내 안에서 씨앗이 되어 자라는 것이다.

어떤 말의 씨앗은 틔워보지도 못하고 스러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줄기씩이나 뻗어 올리다가 돌연 멈추기도 한다. 어라 죽으려나 싶지만 괜찮다. ‘말의 씨앗’이 삶에 뿌리를 내렸다면 죽을 가능성보다 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 삶이란 기본적으로 악착같은 거니까. 내게도 분연하고 감격스러운 뿌리를 내린 말의 씨앗이 있다. 전공한 바도 뜻한 바도 예견된 바도 더더욱 없이 홀홀 숲에 들어선 것이 증명하고 있다.

숲에서 나무집을 짓고 사람들을 불러 모을 거야. 찾아온 걸 후회하지 않도록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어야지. 동그랗게 앉혀놓고 향이 높은 커피를 대접할 거야라고 일기를 쓴 게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숲의 나무집은 동화나 영화에서만 보았을 뿐이면서 수다스러운 ‘관종’ 여고생은 하필 성인이 된 자신의 거취에 대해 숲속을 특정했을까. 일기가 토씨까지 기억나는 까닭은 당시 수학선생께 배운 노래 한 구절 때문. 노래가 너무 좋아서 일기에 저렇게 적었다. 이후로 숲은커녕 광화문 ‘쇼핑의 여왕’으로 소비의 늪에서 한동안 허우적댈 이 소녀는.

허리가 좋지 않은 내게 누군가 등산을 권해 처음으로 등산화를 샀다. 2년 정도 홀로 또는 여럿이 주말마다 북한산에 올랐다. 산이 좋다기보다 하산하면서 마시는 막걸리와 두부의 유혹이 더 컸다. 비어져 나온 디스크가 제자리를 찾을 무렵 삶의 등고선이 조밀하게 그려지던 시기가 왔다. 깎은 듯 뾰족한 시간을 견디며 나아가다보니 숨도 차고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면,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나아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나아가봐야 비슷한 절벽들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절망이 무릎에 들러붙어 떨쳐지지 않았었다. 돌아서면서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뾰족하고 화려한 오르막은 걷지 않겠다고.

과거에 떠올리던 미래와 지금 떠올리는 미래는 그 간격과 폭이 많이 다르다. 내 청춘을 수놓았던 미래란 스스럼없는 기약, 휘발성 다분한 결의였다. 장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맞지만 지금은 가능성을 헤아릴 줄 안다. 말의 씨앗이 싹을 내는 고귀한 경험을 해본 뒤라서 가능하지 않을까 잠자코 생각해본다. 20대의 ‘이담에’와 지금의 ‘이담에’의 결이 다른 이유다.

이담에 나는 낮은 담을 만들고 사계절 꽃이 지지 않을 마당을 가꾸고 싶다.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주인이 있는지 알 수 있는, 뭐해? 라고 묻고 들어와~ 하고 대답할 수 있는 작은 정원이면 좋겠다. 나를 찾아오는 손님의 달뜬 이마는 길목에 심겨놓은 들꽃이 나보다 먼저 반기리라. 밤이 깊으면 모든 빛을 거두어 숲을 쉬게 하고 아침이면 햇살이 깊숙하게 들어오는 나무집. 그 집에서 풀을 뽑고 꽃에 인사하고 착실하게 늙어가야지. 이담에.

안은영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