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찰칵,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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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찰칵,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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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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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봄이다. 촉촉해진 대지를 헤집고 봄이 돋는다. 다사한 아지랑이 야트막한 언덕배기 오솔길에 불꽃처럼 아른거린다. 변산바람꽃, 노루귀, 봄까치꽃, 제비꽃, 여린 풀꽃들의 봄 마중이 한창이다. 개구리 입 떨어지는 경칩과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춘분이 차례로 목련 나무 아래로 지나간다. 만물이 소생한다고 했던가. 강둑 여기저기 다투어 싹이 트고 강물에는 물오리들이 자맥질로 바쁘다. 찰칵찰칵, 봄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해마다 봄이면 나는 숙제처럼 변산바람꽃을 마중 간다. 경주에서 감포 가는 길, 토함산 자락에 자리한 시부거리 마을에 한발 앞서 봄이 온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아마도 가장 가까운 바람꽃 서식지일 것이다. 새끼손가락만 한 바람꽃을 만나려면 발자국도 가만가만 옮겨야 한다. 솜털 뽀송한 노루귀며 노란 복수초는 덤으로 만나는 봄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심심찮게 보이던 변산바람꽃의 고운 얼굴을 근래 들어 만나기가 쉽지 않다. 어쩌다 바람결에 배시시 웃는 바람꽃을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설레기까지 한다. 나에게 봄은 해마다 바람꽃을 타고 온다.

올해는 벚꽃이 지난해보다 열흘이나 일찍 왔다. 며칠 전 온종일 꽃을 재촉하며 또닥또닥 단비가 내리더니 그새 꽃망울을 터뜨리고 화르르 봄이 왔다. 사람들의 옷도 걸음걸이도 한결 가벼워졌다. 집 앞의 산수유나무에 노랗게 물이 오르고 겨우내 들리지 않던 작은 새들의 봄 수다가 아침나절 내내 귓가를 간지럽힌다. 쨍하게 차갑던 햇빛에 온기가 더해지고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마른 나뭇가지에 겨울잠 깬 생명이 꼼지락거리며 뾰족한 입술을 내밀었다.

겨우내 빈집처럼 삭막했던 마당 한 모퉁이 화분에 봄의 문장 같은 연두색 싹이 돋았다. 갸륵한 마음에 물 한 모금 먹이고, 봄 햇살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다 화들짝 놀랐다. 나처럼 마음만 앞서 앞뒤 가리지 않고 한발 먼저 온 탓인가. 겨우 지상에 올라온 작디작은 새순이 바르르 떤다. 추울세라 얼른 비닐로 집을 만들어 숨구멍만 남기고 덮어주었다. 봄기운이라곤 하지만 아직은 제법 쌀쌀한 날씨다. 혹여 생채기라도 나면 푸른 꿈을 틔우기도 전에 얼어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나온 봄의 몸짓은 앙증맞고 연약해 갓 태어난 신생아의 배냇짓과 흡사하다.

반곡지의 봄은 버드나무로 온다.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마다 새 움을 틔운 연초록 이파리는 봄의 밑그림이다. 수백 년의 봄을 들고나며 저인들 푸른 행간의 꿈 한 가닥 없었을까. 관절 마디마다 굳은살 같은 옹이를 품고 까맣게 타버린 속을 다 비워낸 늙은 버들, 비틀리고 굽은 허리 쇠지팡이 짚고 또 봄을 맞는다. 하늘이 코발트색 물감으로 밑칠한 연못에는 산과 들, 휘늘어진 수양버들이 연초록의 물구나무로 들어섰다. 반곡지 물 위에 비친 봄은 신록의 데칼코마니로 그려진 한 폭의 수채화다.

봄은 눈맛으로만 오는 게 아니라 입맛으로도 온다. 봄나물이 지천이다. 아기 속살처럼 뽀얀 쑥이며 방석처럼 펑퍼짐하게 싹을 내는 냉이, 돌미나리며 머위, 온갖 나물들이 봄기운을 받아 기지개를 켜듯 땅을 뚫고 올라온다. 그중에서도 나는 달래를 으뜸으로 친다. 맵싸한 맛이 강한데도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려서 일품이다. 특히나 봄나물 비빔밥에는 달래장만 한 게 없다. 갖가지 나물밥에 매콤 쌉싸래한 달래장 넣고 쓱쓱 비비면 먹기도 전에 입안에 군침이 돈다. 달래는 오래전부터 한방에서 약으로 쓰였다고 한다. 구토와 설사, 가슴과 복부의 통증에 처방되었다고 전해진다. 우리 민족의 건국 신화에 곰이 사람이 되려고 100일 동안 먹었다는 쑥과 마늘, 여기서 마늘은 달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쑥과 달래는 봄나물 중에서도 생명의 강인한 힘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봄이 한창 무르녹을 때쯤에 달래는 꽃대 끝에 자잘한 분홍 꽃을 소복이 맺는다. 봄의 경전처럼.

봄에 오는 꽃들은 대부분 잎보다 꽃이 먼저 온다. 매화며 목련, 진달래, 산수유, 생강나무꽃들이 그렇다. 봄 햇살에 꽃눈을 달고 봄비에 꽃망울을 연다. 봄꽃은 눈 깜짝할 새 화르르 왔다가 후르르 지나간다. 나는 해마다 갓 눈 뜬 봄꽃을 거두어 차를 만든다. 봄에 피는 꽃들은 색과 향이 부드럽고 독성이 거의 없어 꽃차로 만들기에 안성맞춤이다. 새색시 버선 닮은 골담초, 매화, 목련을 덖고 말려 향을 가두고 매겨 봄을 저장한다. 화차는 봄이 주는 선물이다. 다관에 목련꽃이 개화해 우려지면 연노랑 수색이 봄의 교향곡처럼 퍼진다. 그윽한 꽃향기에 나는 봄 햇살 안고 안단테, 아다지오로 숨을 고른다.

새봄마다 기억을 더듬어 쑥버무리를 한다. 방앗간에서 쌀가루를 찧어와 약간의 소금과 설탕, 물을 넣고 어린 쑥 섞어 살살 버무린다. 찜기에 버무린 쑥 한 움큼 얼키설키 깔고 진달래꽃, 삼색제비꽃 곱게 올린다. 그 위에 쑥과 진달래 겹겹이 쌓아 시간 맞춰 찐다. 생전에 엄마가 해주던 것을 흉내 내어보지만, 그때 그 때깔도 맛도 아니다. 몇 번의 봄이 더 지나야 엄마가 만들어주던, 진달래꽃 봄빛처럼 핀 쑥버무리가 될까. 진달래가 곤죽이 된 쑥버무리에 희미해져 가던 불면의 그리움이 찐득하니 묻어난다.

보글보글 끓는 냉이된장국은 봄의 별미, 봄의 냄새다. 내 나름에는 가족을 위해 봄으로 한 상 차려보겠노라 한나절 내내 종종거렸다. 살짝 데쳐 버무린 머윗잎 겉절이, 찔레순 무침, 미나리 초회, 송송 썬 달래 듬뿍 넣은 달래장, 두릅 숙회, 온통 봄이다. 초록의 저녁 식탁을 가만히 보던 아들의 한마디.

“어머니, 식탁에 뱀 나오겠어요”

벙근 왕벚꽃이 봄바람의 간지럼에 꽃망울을 터뜨리듯 가족의 얼굴에도 수선화 닮은 환한 웃음꽃이 왁자그르르 핀다.

찰칵찰칵, 봄이다.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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