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맷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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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맷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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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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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이 다소곳이 소매를 펼친다. 계단 아래로 가볍게 흘러내리다가 위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곡선이 모나지 않으면서 부드럽다. 미끈한 여인네의 몸맵시를 닮았다. 둥근 머리모양 안쪽에는 구름문양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구름은 둥글게 꽃처럼 말려있는 모습이며 뒤쪽으로 길쭉한 꼬리를 매단다. 장중한 층계 좌우에서 계단을 감싸고 앉아 있는 품이 넉넉하다.

소맷돌은 옆막이돌 또는 계단우석이라고 한다. 고궁이나 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돌계단의 난간, 층계 양쪽에 위치하여 이곳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추락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안전을 고려한 시설물이지만 무엇보다 이용자를 보호하려는 배려가 느껴진다. 육중한 돌로 난간을 만들었으니 견고하고 듬직함은 무엇에 비길 수 없다.

구례에 위치한 고택 운조루에는 특별한 쌀독이 있다. 쌀 두 가마 정도가 들어가는 쌀독 뒤편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누구나 능히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쌀이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 와서 원하는 만큼 퍼가라는 의미다. 흉년, 보릿고개마다 굶주린 마을 사람들은 부담 없이 이 쌀독을 이용했다. 운조루의 쌀독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베풂의 소맷돌이었다.

소맷돌의 모양과 특색은 각양각색이다. 돌계단에서 가장 장식이 많이 새겨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직선, 혹은 곡선으로 단순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진 곳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모습의 동물상들을 우스꽝스럽게 조각한 곳도 있다. 반가사유상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자상도 있고 아랍인처럼 멋스럽게 수염을 길러 천연덕스럽게 웃고 선 모습도 있다. 어떤 모습이든지 그곳에 위치한 건물과 공존하면서 그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이웃과 나눔을 실천한 옛 선조들처럼 우리 주변에는 소맷돌같은 배려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헌혈을 하는 사람, 백혈병으로 사경에 처한 학생에게 골수를 제공해 주어 생명을 구해 준 이, 태풍이나 산불, 지진 등 자연재해를 입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자신의 일인 양 도와 준 이웃들, 그들은 모두 마음에 소맷돌 하나를 들여 놓은 사람들이다.

송광사 비림의 계단 옆에 놓인 소맷돌은 조선말엽의 마지막 암행어사였던 이면상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본디 암행어사란 청렴함의 표상이지만, 그는 암행할 고을에 미리 자신의 행차를 알리거나 수시로 접대를 받는 등 적잖은 민폐를 끼쳤다. 어느 해 송광사를 방문했을 때,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선정비를 세우도록 했다. 백성들의 원성을 산 비석은 후일 둘로 쪼개져 계단의 소맷돌이 되었다 한다. 부패한 관리를 낯 뜨겁게 칭송하며 서 있던 비석은 이제 뉘어져 탐욕의 말로와 권력의 무상함을 알리는 징표로 남아 있다.

배려는 배우고 습득해서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과 애틋한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리라. 요즘 크고 작은 사고가 나면 안전 불감증이 만연한 세상이라고 너나 할 것 없이 푸념을 한다. 또 양심이 실종되었다며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자신이 무심코 행한 잘못된 일들에 대해서 반성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무슨 일이든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번쯤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어떨까?

싱그러웠던 내 젊은 날들이 저만치 물러나고 인생의 가을 녘에 서 있다. 별 탈 없이 지낸 나의 평범한 일상들은 구석구석에서 알게 모르게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먼 훗날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춰질까. 새삼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흔적이 부끄럽기만 하다. 자책이 앞서지만 다신 그런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져본다.

연초록 나뭇잎 사이로 옆막이돌의 품이 도드라진다. 한껏 소매를 펼친 그 넉넉한 품으로 구름이며 햇살, 바람이 들락거린다. 하회 같은 품속에 내 지친 오후를 가만히 기대본다. 안희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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