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국채보상운동 출발점’ 대구를 되돌아보다
  • 김희동기자
‘독립운동·국채보상운동 출발점’ 대구를 되돌아보다
  • 김희동기자
  • 승인 202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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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으로 나랏빚 갚아 국권 회복”
북후정 터서 첫 국채보상운동 개최
1915년 달성공원서 광복회 결성도
대구시, 서상돈 옛집·이상화 고택
업적 기리며 관광자원으로 활용중
-대구경북 독립운동의 역사를 찾아서-
사적지를 통해 보는 독립운동 활동의 흔적
광복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2020년 8월 대구 동구 미대 여봉산(礪峰山) 4·26 독립만세운동 8인 애국지사 추모 기념행사를 가졌다. 대구동구청 사진제공.
광복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2020년 8월 대구 동구 미대 여봉산(礪峰山) 4·26 독립만세운동 8인 애국지사 추모 기념행사를 가졌다. 대구동구청 사진제공.

대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1907년 나랏빚을 우리 손으로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며, 서로 다른 사상을 지닌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해 활동한 곳도 대구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대구가 사람과 물산이 모이는 곳이자 육로와 수로로 어디든 갈 수 있는 곳, 즉 대구가 ‘열린 도시’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는 일제강점기 비밀 결사의 주요 활동 근거지이자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항일 운동의 성지이다. 대구형무소뿐 아니라 대구에는 대한광복회·의열단 등 비밀 결사의 활동 근거지가 있고, 인구 비율당 독립유공자도 전국 자치단체 중 가장 많다.

일제강점기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감옥이었던 대구형무소. 민족시인 이육사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애국지사는 200여 명으로 서대문형무소보다도 많지만, 지금은 터만 겨우 남아있다.

1915년 8월25일 국권 회복과 독립을 꿈꾸던 청년들은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결성했다. 대구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광복회(대한광복회로 불리기도 함)는 1910년대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비밀결사조직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가장 격렬히 행동했던 단체였다.


□대구의 독립운동 사적지

광복회 결성지 달성공원 지도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 개최지-북후정 터에서 1907년 1월 9일과 12일(음) 두 차례에 걸쳐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가 열렸다.

며칠 뒤 29일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의에서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 10여명의 공동 발기인 이름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전국에 발수한데서 시작됐다. 이는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고 일본에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막아 보려는 운동이었다. 대구군민대회를 열고, 의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생층과 상인층이 주도했으나 군민대회를 거치면서 점차 부녀자와 하층민들에게 확산됐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의 목적을 달성 하지 못했지만, 전 국민이 참여한 유례가 없는 경제적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광복회 결성지-달성공원은 1915년 7월 15일 박상진 등이 모여 광복회를 결성하고, 1928년 5월 20일 당이 창단된 곳이다. 광복회는 1913년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과 대구에서 결성 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합류해 결성되었다. 이들은 1915년 7월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 모임을 갖고, 단체 이름을 광복회로 정했다. 광복회는 독립전쟁을 추구하며, 만주 독립군기지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자금·인력 등을 마련했다.

대구 사회운동 거점-조양회관 터는 1920년대 신간회 대구지회와 근우회 대구지회의 창립회의가 열린 곳이다. 시장정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8일 시장정(서문시장)에서 출발하여 본정·경정을 거쳐 동성정 일대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이종암 군자금 모금 활동지-대구은행 터는 1917년 이종암이 독립운동 지금 마련을 위해 1만9천원을 탈취한 곳이다.

이상정 고택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이상정이 살던 고택. 현재는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장진홍 의거지-조선은행 대구지점 터는 조선은행 대구지점이 있던 곳으로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이 폭탄 의거를 시도한 곳 이다. 이상정 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이상정이 살던 곳으로 현재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비밀결사 운동지는 1940년 11월부터 1941년 2월까지 비밀결사 백의단·문예부·연구회다혁당 등이 결성돼 활동한 곳이다.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결성지 지도

 

대구공립상업학교 태극단 활동지는 1942년 5월부터 1943년까지 대구상업학교 비밀결사 태극단이 활동한 곳이다.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결성지-안일사는 1915년 서상일 등 달성친목회 회원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가 결성된 곳이다. 문석봉 집터는 달성군 현풍면에 있으며 1895년 공주에서 창의해 1896년까지 의병항쟁을 펼쳤던 문석봉이 살던 곳이다.

 

 


대구중구 계산동 근대화 골목의 서상돈 고택을 찾은 방문객들.
대구중구 계산동 근대화 골목의 서상돈 고택을 찾은 방문객들.

▲서상돈 옛집

서상돈(1851-1913)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 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해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 획득운동을 전개했다.

서상돈 고택 지도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대구로 내려와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 그는1907년 1월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김광제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북후정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군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를 설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국채보상운동 은 1년4개월여 이상 지속되어 보상기금을 모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 성을 촉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개발로 인해 철거될뻔 했던 이곳은 1940년 당시 모습을 복원해 이상화 문학을 기념하는 장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개발로 인해 철거될뻔 했던 이곳은 1940년 당시 모습을 복원해 이상화 문학을 기념하는 장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상화 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시대의 대표적인 대구의 항일운동가 이상화(1901-1943) 시인이 거주하던 고택이다.

대구 출신의 이상화 시인이 1939년에서 생을 마치던 1943년까지 거주했으며 이 집에서 춘향전 등 서적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으며 주로 독서와 연구에 몰두했다.〈나의 침실로>는 달성공원에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로 세워졌다.〈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수성못에 시비와 계산성당 앞 인도에 시를 청동에 새겨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이상화 기념재단 등 국내외 여러 단체들이 힘을 합쳐 2005년 10월27일 현재의 위치에 이상화 고택이 보존됐고 대구시가 관리하고 있다.

두채의 건물과 장독대가 복원돼 서상돈 고택과 마주보고 있으며 인근에는 계산예가가 있다. 이 일대는 근대 문화골목으로 도심속 개화기 근대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골목 곳곳에는 선현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옛정취와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대구시에는 아름다운 거리로 지정돼 있다.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아서

유공자 후손 채말선씨
유공자 후손 채말선씨

▲ 아버지의 희생과 자부심을 이어받아

채말선(여·72)씨는 만세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채송대(1919-1966) 애국지사의 의 2남4녀중 막내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컸다. 다섯형제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광복회 회원들과 친동기간이라 생각하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채송대 애국지사는 1919년 4월 26일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에 있는 여봉산에 올라가 문중 사람이던 채학기·채봉식·채갑원 등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튿날 28일에도 채경식·채명원·권재갑 등과 여봉산에 다시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자진 해산했는데 뒤늦게 알게된 일군헌병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채말선씨는 “어릴때 아버지 어깨에 큰 흉터가 있어 어머니께 물었더니 만세운동하다 일본순사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해서 나는 평생 일본은 나쁜 놈들 이라고 생각한다”며 “아버지는 천수답을 일구며 살았는데 정말 사는게 힘들었지만 여섯 자식을 반듯하게 키우시려고 애를 많이 썼다”며 눈물을 보였다.

대구 동구에서는 지난 2020년 8월15일 4·26 독립만세운동 애국지사 8인을 추모하는 미대 마을 입구에서 여봉산 정상까지 ‘여봉산 독립만세운동길’로 명명한 약 2㎞를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에 울분을 참지 못해 만세시위를 펼친 당시 애국지사의 심정으로 발자취를 따라 애국정신과 광복절의 의미를 가슴속 깊이 새기면서 걷는 행사를 가졌다.


유공자 후손 신태환 씨.
유공자 후손 신태환 씨.

▲백부의 희생은 나라사랑으로 이어져

신태환(81)씨는 신산축(1907-1939) 애국지사의 후손으로 다양한 광복회 활동을 펼치며 늘 광복회 일에 앞장서고 있다.

신산축 지사는 1932년 5월17일 일본 애지현(愛知縣)에서 문화보급회(文化普及會)를 조직해 한국인 노동자의 권익보호활동 및 민족의식 고양을 위한 계몽활동 등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8년 12월5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9년 2월 12일 명고옥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고 항소 중에 일제의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동년 3월 25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신태환씨는 “신 애국지사님이 결혼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내가 호적이 입적되었다”며 “큰아버지께서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을 하신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자식들에게도 나라가 위태로울때는 물러서지말고 정면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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