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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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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 담이 사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을 품어오던 견고한 시멘트 블록 담이 하나둘 허물어졌다.

주차 공간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담의 문화에 익숙해진 터라 한동안 허전하고 이웃 간의 낯선 풍경도 경험하게 될 것 같아 염려스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담이 없어지자 확 트인 공간은 소통의 장이 되었다. 이웃들은 지나가다 서로 안부를 묻고 낯선 사람이 기웃거리면 관심을 가져주었다. 시멘트 블록 담이 주는 묘한 이질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막으로 작용했나 보다.

담이라고 하여 무너뜨려야 하는 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 친화적인 흙담을 둘러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지체 높은 양반집은 안채와 바깥채를 구분하는 것으로 담을 둘렀으나 높지 않았다. 하인들이 기거하는 곳은 안채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얕은 담을 둘러, 얼굴 붉히지 않고 바깥채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이웃의 안부를 묻고 음식도 건네며 인정을 물고 나르던 통로였다. 그러나 주인집 아씨를 연모하는 떠꺼머리총각에게는 높은 벽이었을 것이다. 담은 낮아도 마음의 벽을 느끼면 높아 보인다.

외관상 높은 담은 보는 것만으로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나 거무티티한 블록 담으로 둘러쳐진 학교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학교 주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소식을 접해서인지 그곳을 지날 때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못 신경이 쓰였다.

동네 담이 사라진 후, 우리 집 근처에 있던 학교 담도 허물기 시작했다. 시멘트 블록 담을 걷어내고 학교 운동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낮은 담이 조성되었다. 높은 담이 사라진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자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시멘트 담이 사라진 자리는 불신과 경계가 사라졌다.

몇 년 전 성주 한개마을에서 소담스러운 담을 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흙담이었다. 진흙에 지푸라기를 섞어서 쌓아 올린 담이었는데, 중간중간 돌이 박혀 있고 기와로 덮여 있었다. 담 너머로 배롱나무가 꽃을 피워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담을 오르는 담쟁이넝쿨은 밋밋해 보이는 흙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담 한쪽을 돌아드는데 간간이 내리던 빗줄기가 굵어졌다. 후두득후두득 우산에 꽂히는 빗소리와 함께 흙담이 서서히 젖기 시작했다. 땅과 인접해 있는 담 아랫부분은 돌이 촘촘히 박혀 있어 물이 젖어도 쉬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단단하게 자리 잡은 것은 어떤 외부환경에도 끄떡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집 앞에 이르자 담을 넘지 못한 능소화가 고개를 숙이고 빗속에서 떨고 있었다. 드러내 놓고 말하기보다 수줍은 듯, 알 듯 말 듯한 표정에서 고혹미가 더 풍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홀한 주황색 꽃에 넋을 잃고 쳐다보다 솟을대문을 발견했다. 슬쩍 들여다보니 무궁화가 정갈하게 심어져 있었다. 여느 곳에서 본 무궁화보다 꽃잎이 크고 선명해 보였다. 토종 무궁화인 듯싶었다. 튼튼하게 뿌리내리기까지 얼마나 살뜰히 가꾸었을지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다. 눈길이 자꾸 가서 좀 더 살펴보니 독립운동을 한 분의 집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능소화와 무궁화는 어디서라도 볼 수 있으나 흙담을 걸으며 만난 얼굴에서 주인의 고아한 품격이 느껴졌다.

한개마을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곡선의 담이 이어져 있었다. 담을 배경으로 해바라기가 한창 자라고, 담쟁이넝쿨이 짙은 초록으로 손을 뻗어 내리는 중이었다. 개방된 곳에서 바라보는 것과 흙담으로 반쯤 가려진 곳에서 바라보는 것은 그 느낌이 다르다. 개방된 곳에서 보는 해바라기는 거침없이 뻗어가는 힘찬 기운을 느낀다. 흙담 밖에서 바라보는 해바라기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는 순박한 새색시를 보는 것 같다.

껑충 자란 백일홍은 담 밖에서 보아도 빗물에 더욱 붉게 빛나고, 담을 따라 군데군데 심어진 키 큰 나무는 담장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느껴졌다. 담장에 얹힌 기와는 흙담에 운치를 더해 주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쾌한 빗소리를 음향 삼아 걷다 보니 복잡한 도심에서 얽히고설킨 일들이 하나씩 지워져 갔다. 마을 뒷산과 접해 있는 담을 돌아 다시 마을 입구로 왔다. 초록과 원색의 꽃들을 흙담에 피워 올린 한개마을은 비에 스며들어 더욱 고즈넉해 보였다.

허물어야 소통의 장이 될 수도 있지만 경계를 지켜 더욱 빛나는 것도 있다. 낡고 오래되었다고 다 허물 것은 아니다. 은근한 멋으로 살짝 가려주는 담의 매력을 살린다면 공간에 표정을 주는 일일 수도 있다. 한적한 길에 흙담을 배경으로 타박타박 걸으며 지난 삶을 반추해 보는 것은 바쁜 현대인에게 힐링의 역할을 해준다.

비가 더 세차게 퍼부었다. 흙담도 서서히 빗물에 스며들었다. 내가 중심에 서서 주인공이 되는 삶도 의미가 있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가 더 돋보일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서서히 젖어 들어 금방 마르지 않는 흙담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서서히 스며들어 오래도록 가까이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박미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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