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절기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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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 절기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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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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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이슬과 산들바람에 가을이 실려서 오면 산풀이 제 먼저 알고 억세게 익어간다. 한낮의 매미소리는 귓전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고추잠자리 날갯짓은 창공에서 바빠진다. 포도송이는 포도원 주인의 꿈으로 탐스럽게 영글어서는 마침내 제 검은빛보다 더 서러운 눈빛의 어느 아낙이 모는 트럭 위에서 슬픈 몰골로 꿈 많던 시절의 추억에 젖어 있다. 오늘이 백로(白露), 엊그제 처서이더니 보름 있으면 어느새 가을의 한복판, 추분이다.
 지난 여름이 제아무리 더웠대도 어찌 태양계의 운행을 이기랴. 밤 기온은 내려가고 공기중의 수증기는 엉겨 풀잎에 맺힌다. 하얀 이슬이다. 삼베 이불 개어 넣고 춘추이불을 꺼내야할 열 다섯 번째 절기 백로. 대기가 청정하다. 중국에선 백로에서 추분까지 보름간을 5일씩 세 쪽으로 쪼개 첫 5일 동안엔 기러기가 날아오고 다음 5일 간은 제비가 돌아가며, 마지막 남은 닷새는 뭇 새들이 먹이를 동장(冬臧)한다고 했다.
 `백로에 비가 오면 오곡이 겉여물고 백과엔 단물이 빠진다’는 말이 있듯이 이 즈음엔 비가 오지 않는 게 수확을 앞둔 오곡백과에 좋다. 지금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소위 `210일풍(입춘으로부터 210일 되는 무렵 올라오는 태풍) 같은 9월 태풍도 종종 심술을 부렸지만 지금까지는 다행히 태풍 소식도 없으니 참으로 `기쁜 가을날’이다.
 백로에서 추분까지는 포도가 제철이다. 편지를 쓰던 시절, 이 무렵 서간문의 첫머리 인사말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후 일향 만강하옵시고…’라고 멋을 부렸던 건 이 때문이었다. 오곡백과와 함께 익어가는 2006년 가을, 포도송이처럼 탐스러운 다산의 풍요를 온 국민이 고루 나누어 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라는 온통 전시작통권으로, 중국 동북공정으로, 일본의 핵무장 의지표명으로, 정권의 코드인사로, 청년실업 걱정으로 시끄럽기만 하니 답답하다. 원컨대 끝까지 태풍이나 없이 지나가기를. 정재모/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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