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말하길 사랑은 이 길로 올 거래요
  • 경북도민일보
바람이 말하길 사랑은 이 길로 올 거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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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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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 블룸의 을 들으며
오성은 작가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다 어스름한 새벽녘이 되어선 정의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지 모르겠다. 물론 정의할 수 없다고 해서 답하지 못할 것도 없다. 오직 정답만을 말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삭막하기 그지없을 테니. 사랑의 정의 대신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이야기하면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관념에 가까이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당신과 논쟁할 마음이 전혀 없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그 모든 게 사랑이고, 무엇 하나 틀린 건 없다.

서로의 음을 쫓아가는 현악기의 우아한 협주곡(헨리 퍼셀 - 디도와 아이네아스 Z.626 서곡) 너머로 동유럽 특유의 고전적인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열차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셀린(줄리 델피)은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피해 자리를 옮긴다. 그곳에는 제시(에단 호크)가 앉아 있다. 셀린은 철학자 조르쥬 바타이유의 저서 ‘Le Mort(죽은 자)’를 제시는 독일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의 자서전 ‘All I need is love(나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야)’를 읽고 있다. 소음을 피해 식당칸으로 옮긴 청춘 남녀는 즉흥적으로 비엔나를 함께 여행하기로 한다. 둘 사이에는 어색한 긴장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들은 아직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



- Come here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는 청춘의 대화는 그들이 열차에서 읽던 책의 주제처럼 성(性)과 사랑을 거쳐 영혼의 존재로, 환생의 테마로, 죽음으로 향한다. 트램에서 내린 제시와 셀린은 레코드 상점(Alt&Neu 올드&뉴)에서 LP를 고른다. 셀린은 캐스 블룸(Kath Bloom)의 을 아느냐고 물어보자, 제시는 고개를 흔들며 청취실에서 함께 들어볼 것을 제안한다. 텐테이블 위에서 검은 바이닐이 제자리를 돌고 있다. 셀린이 톤암을 조심스레 내려 앉히면 바늘이 소릿골을 부드럽게 긁어낸다. 단조로우면서도 아름다운 통기타의 아르페이지오가 흐르자 좁은 청취실의 공기는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서로의 눈빛을 살피는 제시와 캐스는 노래의 가사처럼 찾아오는 어떤 바람을 감지한다.

‘There’s wind that blows in from the north and it says that loving takes this course’(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말하길 사랑은 이 길로 올 거래요)

캐스 블룸의 담백한 목소리는 두 사람을 계속 가까이 오라고 말한다. 이리로 오라고 속삭인다. 그들은 도시 이곳저곳을 누빈다. 비엔나의 공기는 이제 달라져 있다. 그들이 언제 사랑에 빠진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현실에서도 또한 영화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낮의 기운은 슬며시 물러가고 세상의 그림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제시는 해가 뜨고 난 이후 미국으로 떠나야 하고, 그들의 충동적인 하룻밤 여정도 얼마 남지 않았다.



- 모든 것은 별의 파편이야

달콤한 말도, 사랑의 밀어도, 젊음도, 한낮의 태양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다.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는 없다. 어차피 인생에는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순간뿐이다. 우리의 탄생이 그러하듯 결국 모든 건 죽음으로 향한다. 도시 곳곳에서 키스를 나누는 제시와 셀린은 서로의 마음에 확신을 가지며 점점 이 여행의 끝을 예감한다. 더이상 감상적인 음악이나 고풍스러운 바로크 현악은 들려오지 않는다. 비엔나의 야경과 일상의 소음만이 가득할 뿐이다.

밤은 깊었고, 달리 갈 데라곤 없다. Bye(안녕)와 Goodbye(안녕), Au revoir(다음에 봐)와 Later(또 만나)를 장난스레 주고받던 연인은 잊지 못할 밤을 보내기로 한다. 여정의 끝은 한적한 공원, 그들은 사랑을 나눈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 비포 선라이즈다.

이른 아침의 비엔나에는 하프시코드(Harpsichord) 소리가 우아하게 울려 퍼진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25번 변주>에 맞춰 춤을 추던 제시와 셀린은 이 시간을 기억하기 위한, 이별하기 위한, 사랑을 유보하기 위한 키스를 나눈다. 아침의 종소리가 들려오면 이제 환상의 밤은 끝이 난다. 하루의 시간 동안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과 삶을 성찰한 이 청춘은 이제 헤어질 일만 남았다. 세상의 모든 역은, 플랫폼은 만남과 이별의 장소이다. 이제 해가 떠오르는 비엔나에는 텅 빈 풍경이 펼쳐져 있다. 오직 바흐의 첼로 소나타(BWV 1027 3악장 안단테)와 아침이 오는 현재,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의 약속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사랑은.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오성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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