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저 탄광에 갇힌 고통의 역사… 왜곡 아닌 진실 말해야 할 때
  • 김희동기자
1㎞ 해저 탄광에 갇힌 고통의 역사… 왜곡 아닌 진실 말해야 할 때
  • 김희동기자
  • 승인 20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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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근대유산’ 이유로 세계유산 신청
조선인 강제징용·수많은 희생자 외면
세계유산위, 日하시마탄광 역사 왜곡
“관련국과 대화” 첫 기억유산 원칙 적용
한일 관계 미래 위해 역사 바로잡아야
-대구경북 독립운동의 역사를 찾아서-
사적지를 통해 보는 독립운동 활동의 흔적
11일 후쿠오카 앞 바다 하시마섬( 군함도)의 파도는 잔잔하고 하늘은 높았다. 사진=이장훈 작가 제공

세계 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이란 정의는 세계 유산 협약에 따라 유네스코에서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문화유산을 일컫는다.

지난 25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17일(현지시각) 열린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는 문화유산 33건, 자연유산 9건을 세계유산에 신규 등재하고 5건을 확장 등재했다. 이로써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933건, 자연유산 227건, 복합유산 39건 등 총 1199건이 됐다.

올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적용된 ‘기억유산’ 원칙이 눈길을 끌었다. 이번 회의에서 등재 유산의 보존 현황도 점검하면서 특히 일본에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탄광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권고한 후속 조처 이행을 위해 관련국과 대화를 지속하라고 결정했다.

우리 외교부는 이와 관련해 일본 ‘군함도’가 세계유산 등록 후속 조치로 주변국과 대화하라는 결정을 채택한 것과 관련해 일본이 이를 성실하게 이행해나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정부는 일본의 양심과 성의만 바랄 게 아니라 외교 역량을 결집해 국제사회와 함께 단호히 대응해야 마땅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이번 회의에서 고대 문명 가야를 대표하는 유적을 새로 등재했다. 가야고분군은 1~6세기 중엽에 걸쳐 영남과 호남 지역에 존재했던 고분 유적 7곳을 묶은 유산으로, 이번 등재로 한국은 문화유산 14건, 자연유산 2건 등 총 16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하시마탄광내 일본 최고 간부들 숙소가 전망 좋은 윗쪽에 위치해 있다. 일본 관광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하시마탄광내 일본 최고 간부들 숙소가 전망 좋은 윗쪽에 위치해 있다. 일본 관광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군함도, 일제 강점기의 어둠고 아픈 역사

하시마 섬 구글 지도

광복이후 78년이 지났고 일제강점기는 100년 전의 역사가 됐으며 가혹하고 처참했던 시절을 겪었던 할아버지·부모세대는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100세을 바라보고 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외교적 관계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들로 산적해 있는 문제에 대해 정부는 명쾌한 답을 내 놓지 못하고 있다.

하시마 섬은 나가사키반도로부터 약 4.5㎞떨어진 미쯔비스 석탄광업(주)의 주력 탄광이었다. 타카시마에서 남서쪽으로 약 2.5㎞, 나가사키 항구에서 남서쪽으로 약 19㎞떨어진 앞바다에 위치해 있다.

하시마 섬은 후쿠시마 항에서 여객선으로 40여분이 걸린다. ‘시마(しま)’는 포항 호미곶처럼 육지에서 툭 튀어 난 곳을 이르는 말이다.

석탄 채굴을 위해 지하 갱도로 내려가는 곳.
석탄 채굴을 위해 지하 갱도로 내려가는 곳.

지난 11일 오후 2시 여객선에는 한일문화포럼 회원 16명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일본 단체 관광객 등 200여명이 탑승을 했다.

섬은 처음부터 석탄을 채취하기 위해 개발됐다. 지하 1㎞가 넘는 해저 탄광으로 남북으로 약 480m, 동서로 약 160m, 둘레 약 1200m 면적 약 6만3000m²의 크기로 우리나라 마라도 3만3055m²의 2배 정도다. 암벽이 섬 전체를 둘러싸고 고층의 철근아파트가 늘어선 섬의 외관이 군함 ‘도사’와 닮아 군함도라고 불리게 됐다.

한일문화친선교류회 회원들이 일본에 지어진 최초 아파트라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한일문화친선교류회 회원들이 일본에 지어진 최초 아파트라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비극의 현장을 둘러보는 마음은 참담했다. 한수산 작가의 소설 ‘군함도’ 의 활자로 읽었던 배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주인공 정미소 아들 지상, 명국, 우석과 같은 강제 징용자들이 노동의 고통과 삼식, 태복이처럼 탈출을 시도하다 억울하게 죽어 갔을 비명 소리는 나무 한그루 없는 땡볕 더위에 묻혔다. 관광객들의 조용한 발걸음과 간간이 들리는 해설사의 낯선 이국말이 바람한점 없는 하시마 섬에 낮게 퍼졌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고요했다.

일제강점기인 1943~1945년 약 800명의 조선인이 강제 징용으로 끌려와 집중적으로 석탄 채굴 노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배고픔과 위험 속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채탄 작업에 시달렸다. 이중 질병, 익사, 탄광 사고 등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122명에 달한다.

사진의 왼쪽 가장 높은 곳에  후쿠오카에서 해수로  연결돼 물을 공급받은 급수탑이 있다. 일본 관광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의 왼쪽 가장 높은 곳에 후쿠오카에서 해수로 연결돼 물을 공급받은 급수탑이 있다. 일본 관광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1945년 세계제2차대전이 종식되고도 석탄업이 번영할 당시 5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 정도로 큰 섬이었다. 1950~1960년대 일본의 석탄 업계가 몰락하면서 1974년 폐광됐다. 이후 모든 노동자와 주민이 떠난 섬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됐다. 지금은 작은 섬 위에 남은 으스스한 고층 건물과 오밀조밀 모여 있는 폐허가 된 건축물만이 섬을 지키고 있다. 세계 3대 유령 도시 및 세계 3대 폐허로 우쿠라이나의 ‘프리피야트’, 일본의 ‘군함도(하시마)’, 프랑스의 ‘오라두르 쉬르 글란’이 있다. 해설사는 이곳의 모든 건물은 자연 그대로 풍화되도록 놔둔다고 했다.


2015년 7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신청한 하시마 탄광 등 23개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고 한국 등 주변국들은 반발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일본 니가타현 북서쪽 사도섬에 위치한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노리고 있다. 사도광산도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받은 일본의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三菱)가 운영한 광산이었다. 가장 많은 한국인을 강제노동시킨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사도광산이 제2의 군함도로 되지 않도록 범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적극적으로 저지해야 한다. 또한, 강제 노역과 관련된 범죄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일 관계의 발전적인 미래를 열어야 할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아들이 기록한 아버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종욱(우) 씨와 아버지 故 김상진 씨(2003년 촬영)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종욱(우) 씨와 아버지 故 김상진 씨(2003년 촬영)

김종욱 (60·경주)씨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다. 김종욱씨는 강제징용 피해자였던 아버지와 같은 처지의 시간을 견뎌 온 재한일본인 처, 경주 나자레원 할머니들의 삶과 역사가 숨겨지고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 20년간 기록해 왔다.

“누군가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면 네가 해라”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故김상진(1923-2017)씨가 아들에게 준 평소 유언과도 같은 말이다.

김상진씨는 1923년 의성군의 초전마을에서 출생했다. 1941년 초여름 결혼을 앞둔 형님을 대신해 강제 징용을 가 평생토록 잊히지 않는 모진 고생을 겪었다. 1941년 안동역에는 의성 260명·안동 400여명은 지역에서 2~30대 건장한 남성들이 강제징용돼 부산행 열차를 탔다.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후쿠오카 하카다 항에 도착하는데 까지 닷세가 걸렸다. 잠시 쉴틈도 없이 구명조끼를 입고 배를 타고 군용트럭을 타고 탄광에 도착한 곳이 일본 미쯔비시 계열사인 ‘미쓰이’ 탄광이었다. 같이 일하던 조선인 동료들이 갱도가 무너져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하며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약 5년간 일본의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한 후 1945년 광복이 되고도 몇달 뒤 10월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때 같이 징용됐던 동료중 의성사람은 26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19세의 나이로 강제 징집된 고 김상진씨의 40대 모습 (1956년 촬영)
19세의 나이로 강제 징집된 고 김상진씨의 40대 모습 (1956년 촬영)

김상진씨는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변화하는 세계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준비되지 않았다고 깨달아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24세에, 한글도 쓸 줄 몰랐던 그는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공부에 집중했다. 기초부터 시작해야 하는 부끄러움도, 학비나 책을 구해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배움에 대한 강인한 집념으로 3년간 독학으로 27세의 늦은 나이에 안동사범대에 입학해 교사가 됐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받은 핍박과 설움이 다음 세대들에게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교육현장에 투신했다.

지난 5월 강제징용된 아버지의 생활사를 아들 김종욱 사진작가는 경북대와 공동 저자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김상진의 생활사’를 발간했다.

김종욱 작가는 “1923년 아버지가 태어나셨고, 아들인 제가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하면서 아버지와 비슷한 처지의 ‘재한일본인 처’를 기록했다. 그리고 ‘재한일본인 처’에 대한 강의를 통해 원동력이 됐던 아버지가 100년 만에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라면서 “이번에 발간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김상진의 생활사’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의 100년 기간의 다큐멘터리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경주를 방문할 때에도 한 켠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아버지의 삶에 대해 기록했다. 그렇게 30여년 간 쌓아온 아버지의 구술영상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보다 사실적이고 현장감 갖춘 책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김상진의 생활사’(2023.경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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