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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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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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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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뒷모습이 수북하다. 늦가을부터 떨어지는 나뭇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비처럼 내린다. 낙엽들은 갈팡질팡 달리다 멈추다, 대문 앞으로 헤쳤다 모인다.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쌓인다. 날마다 저들과 한판 씨름을 한다. 이제나 끝이 났을까 돌아보면 허리를 채 펴기도 전에 득달같이 달려든다. 언제나 판정패다.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지 5년이 되었다. 작으나마 마당이 있어 마음이 동한 데다, 집 앞 공원과 강은 나를 유혹하기 충분했다. 여름 공원의 활엽수는 온통 짙푸르렀고 색색의 백일홍과 풀꽃이 햇살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나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마음을 정했다. 청춘 같던 여름과 가을이 그새 단풍 들고 낙엽이 되어 몰려올 거라는 생각을 그때에는 하지 못했다. 노란 은행잎, 붉은 단풍잎, 바스락해진 느티나무 낙엽이 바람에 실려 공원 울타리를 넘어 도로를 다투어 질주한다. 그러다 누가 손짓이라도 한 것처럼 집 앞에서 멈춘다. 수북수북.

겨울은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에 먼저 오는지도 모른다. 올망졸망한 장독대에 서리가 싸락눈처럼 하얗게 내렸다. 쨍한 찬바람에 무시래기가 시들하게 말라간다. 썰어 말린 박고지며 무말랭이도 엔간히 꾸덕꾸덕해졌다. 요즘은 겨울이라고 해서 미리 채소나 먹거리를 쟁여놓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맘때면 채소가 부족한 겨울 동안 먹거리 장만을 위해 채소 고지를 만들고 여러 사람이 모여 한꺼번에 김치를 담가 저장해놓곤 했다. 이것이 유네스코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 민족 고유의 김장 문화이다.

해마다 초겨울이면 시누이들과 시댁에 모여 김장을 한다. 절이고 씻어 물기를 뺀 배추가 산더미만 하다. 육수 달인 물에 고춧가루, 마늘, 젓갈, 청각 등 온갖 재료를 버무린 양념장은 온 집안에 매콤 얼얼한 냄새를 진동케 한다. 게으른 겨울 햇살은 창문을 넘어 길게 들어오고 시어머니와 오랜만에 만난 시누이들의 시끌벅적한 수다는 김장에 감칠맛을 더한다. 한 해 마지막 숙제 같은 김장이 마무리되고 집집의 통마다 푸짐히 채워지면 겨울 채비가 얼추 된 거 같아 마음이 든든해진다.

식물과 동물들도 월동 준비를 한다. 나무들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물기를 줄이고 떨켜라는 세포층을 만들어 물과 양분이 잎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 이 과정에서 초록의 엽록소가 파괴되고 새로운 색소를 합성하는데, 이것이 단풍이다. 그리곤 잎을 떨어뜨린다. 목련이나 동백나무는 겨울 동안 겨울눈이 얼거나 마르지 않게 솜털이 잔뜩 달린 껍질과 단단한 비늘로 감싸고 생장을 멈추고 잠을 잔다. 새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몇몇 동물은 영양을 충분히 섭취한 후 동면에 들기도 한다. 이처럼 식물과 동물의 겨울나기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일 것이다.

며칠 전 마당에 온실을 장만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월동을 위해 화분의 식물들을 거실과 베란다에 들여놓았었다. 하지만 그동안 덩치도 커지고 개체 수가 늘어나 하는 수 없이 따로 집을 장만해 주게 되었다. 온실 바닥엔 두꺼운 보온재를 깔고 끈으로 단단히 고정해 매서운 한파의 칼바람에도 끄떡없게 잡도리했다. 최근 기후변화로 인해 겨울이 더 혹독해지면서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나무가 종종 생긴다고 한다. 온실의 식물들이 새봄이 올 때까지 서슬 오른 동장군을 아무 탈 없이 지나 보낼 수 있기만을 바라면서.

내가 엄마의 치맛자락에서 맴맴 했을 적에는 초가을부터 겨울 채비를 했다. 여름 태풍과 장마로 방문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누렇게 된 문살에 엄마는 입으로 물을 뿜어 불렸다 뜯어내고 풀 먹인 한지를 새로 발랐다. 문 한쪽 귀퉁이에는 말린 들국화를 곱게 올려 액자 같은 뙤창도 만들었다. 손바닥만 한 그곳은 퇴근하던 아버지의 손에 들린 봉지를 기다리던 사각의 눈이었다. 엄마는 방문마다 생선의 지느러미 같은 문풍지를 달았다. 매서운 겨울 북풍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올라치면 그것은 돌쩌귀를 부여잡고 몸부림을 치며 울어댔다. 그 덕에 우리 형제들은 꽁꽁 겨울을 탈 없이 날 수 있었다.

나는 유독 추위를 많이 탄다. 그렇다 보니 겨울을 나기 위해 꼭 필요한 건 난방이다. 60~70년대만 해도 취사와 난방의 주된 연료는 연탄이었다. 그나마도 아끼느라 불구멍은 반의반도 안 되게 열어 온기가 겨우 있는 둥 마는 둥 했다.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면 하루 두 번 깔축없이 갈아야 해서 엄마는 늘 새벽잠을 설쳤다. 더위도 힘에 부치긴 마찬가지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북풍으로 무장한 동장군을 견뎌야 하는 추위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지난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여파로 인하여 국제 에너지 가격이 치솟았다. 더불어 난방비용도 급격하게 올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쳐 연말이면 전해지던 연탄 기부의 손길마저 끊겨 취약계층의 겨울나기가 올해엔 한층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눈이 와야 겨울답다고 한다. 또 추워야 겨울이지 한다. 그러나 난방도 되지 않는 집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겨울나기는 매섭고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하는 생존을 위한 힘겨운 발버둥이다. 우리 속담에 ‘겨울 화롯불은 어머니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려면 화롯불이 어머니보다 좋을까마는,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하더라도 추위를 이겨내는 데는 따뜻한 게 최고라는 의미가 아닐까.

거리를 배회하던 낙엽들이 양지바른 구석에 모로 누워 있다. 구세군 자선냄비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 잔의 커피값이 소외된 이웃에게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는 온기로 전해지기를. 댕그랑댕그랑.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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