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폐허 속에 자라나는 새싹, 따뜻한 관심의 빛으로 꽃 피우자
  • 이경관기자
사랑의 폐허 속에 자라나는 새싹, 따뜻한 관심의 빛으로 꽃 피우자
  • 이경관기자
  • 승인 201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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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창작과 비평’에‘소라나나나기’연재 후 1년 여간 개고 거쳐 새 제목으로 소설 탄생

 

▲ 황정은 작가.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l 창비 l 228쪽 l 1만2000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새끼를 먹여본 손맛이지. 그런 연륜,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43쪽)
 ‘황정은 월드’. 이름 그 자체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한 작가 황정은이 최근 세 번째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를 펴냈다.
 이 소설은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소라나나나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됐던 것으로 1년 여간 개고를 거쳐 새 제목으로 탄생됐다.
 특히 이 책은 지난해 출간한 ‘야만적인 앨리스씨’와 같이 폭력에 대해 다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을 붕괴시킬 수 있는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소라와 나나, 나기의 목소리가 각 장을 이루며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세 사람의 서로 다른 감정의 진술을 통해 각각의 삶에 대한 온도차를 느낄 수 있다.
 아버지인 금주 씨가, 일하던 공장에서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자 엄마인 애자는 삶의 의욕을 잃는다. 세간 일체를 넝마주이에게 넘기고 두 집이 한 개의 현관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반 지하방으로 이사한다. 그곳에서 애자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결국 죽을 인생, 살기 위해 애쓸 필요 없다고 두 딸에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세계에 갇힌다.
 “소라와 나나는 아주머니의 밥을 먹고 자랐으므로 우리 자매에게 집밥, 하는 것은 마땅하게 이 집의 밥과 반찬입니다. 아주머니의 손 맛. 성장기에 압도적으로 그 맛에 물들었으므로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이 집 외의 맛은 소라에게도 나나에게도, 남의 집 맛입니다.”(154쪽)
 여느 때처럼 돈 몇 푼을 두고 집을 나간 애자가 며칠 째 들어오지 않자 두 자매는 쉰 떡을 밥솥에 데워 먹는다. 쉰내를 맡고 건너온 옆집의 순자 아주머니는 그 떡을 하나 맛보고는 ‘이 떡이 맛있으니, 자신의 밥과 바꿔 먹자’고 말한다. 그 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나기의 도시락과 함께 소라와 나나의 도시락도 함께 싸며 두 자매를 거둬 먹인다.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엄마는 없지. 엄마가 없다면 애자도 없어. 더는 없어. 애자는 없는게 좋다. 애자는 가엾지.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지만, 그래도 없는 게 좋아. 없는 세상이 좋아.”(45쪽)
 순자 아주머니의 밥으로 자매는 성장한다. 각자 회사를 다니며 살아가던 어느 날 나나가 임신을 하면서 자매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소라는 또 다른 애자가 될 나나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정작 나나는 자신과 다른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출산을 결심한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104쪽)
 나나는 아기의 아버지인 모세와 결혼을 결심하고 그의 집을 찾는다. 그녀는 그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을 하나 발견한다. 화장실이 두 개나 있고 집안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 없음에도 화장실 한켠에 ‘요강’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쓰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놀라자 그는 가족끼리 어떠냐며 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요강을 채우는 사람과 그것을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는 그에게 실망한 뒤, 결혼을 단념한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187쪽)
 아비와 함께 어미도 상실한 소라와 나나를 보듬는 나기와 순자 아주머니. 그러나 그들 역시 저마다의 아픔이 있었다.
 사과상자를 나르다 죽은 남편을 대신해 평생을 노상에서 과일을 판 순자와 아무도 축복해 줄 수 없는 사랑에 힘겨워하는 나기.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자신들의 사랑을 지켜내고자 노력한다.
 사회의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자매는 폭력의 바깥을 상징하는 나기와 순자로 인해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는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227쪽)
 2014년, 대한민국은 무자비한 사회의 폭력과 자본의 두 얼굴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수 없이 많은 소라와 나나가 태어났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들에게 나기와 순자 아주머니가 돼 줘야 한다. ‘사랑’이라는 묵직한 말 대신, 함께 아파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묵묵히 계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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