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깜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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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깜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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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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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래 수필가
[경북도민일보] 참 편리한 세상이다. 무거운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않아도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비밀번호를 눌러 자동차의 문을, 사무실 출입문을 열 수 있다. 사전에 등록된 나만의 비밀번호가 일상 업무는 물론이고 동호인 모임에, 금융거래에 만능으로 사용되는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도 집을 나선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기다리고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호주머니에 든 리모컨을 누르면 철커덕 하는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린다.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간밤에 자동차를 세워둔 위치가 기억나지 않을 경우 아주 편리하다. 시동을 걸어놓고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꺼낸다. 바탕에 나타난 점들을 내가 정해놓은 비밀의 순서대로 연결하면 화면이 켜진다. 일정이 입력된 어플을 불러내어 오늘 수행해야 하는 일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출발한다.
 사무실로 들어선다.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의 전원스위치를 누르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시스템이 움직이게 된다. 인터넷에 접속한 후 메일에 들어가려면 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메일로 보내온 각종 청구서를 보려면 따로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인터넷뱅킹을 하려면 인증서암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다음 과정이 진행된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나,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카페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기안을 하거나 결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퇴근시간이다. 차가 아파트 경비실에 다가가면 가로막대가 자동으로 열린다. 비밀번호를 누르면 공동현관문이 열린다. 우리집으로 들어서는 데도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들어와서는 텔레비전 리모콘의 단추를 이것저것 누르며 보고 싶은 채널을 찾고 소리를 키우거나 줄인다. 그러는 사이 버튼을 눌러 가동시킨 압력밥솥이 취사가 완료되었다고 말을 한다. 
 잠자리에 누우면서 생각해본다. 오늘 하루 내가 누른 디지털기기의 버튼이나 입력한 비밀번호가 몇 개인가? 인터넷에서, 자동차에서, 집에서 내가 기억하여 두드리거나 눌러야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내일은 또 무슨 비밀번호를 만들고, 몇 개의 버튼을 눌러야 할까? 나의 걱정은 그쯤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날 내가 사용해온 비밀번호들을 깜박 잊어버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겼다.
 그저께 백화점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려다가 비밀번호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얼굴이 붉어졌던 일이 있었다. 카드의 주인이 맞는지를 의심하는 점원의 눈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얼마 전에는 사우나탕 옷장에 내 손으로 입력한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쩔쩔매다가 할 수 없이 관리인을 불러 해결하기도 했었다.
 이 심각한 증상에 나는 ‘디지털 깜박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집 현관을 들어오는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밖에서 날밤을 지새우는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정이 없고, 딱딱한 디지털기기들과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이니 지금부터라도 디지털 깜박증을 극복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아야만 했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인 셈이다.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것은 내가 회원으로 가입된 모든 인터넷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기록해두는 수첩을 만드는 일이었다. 만약을 생각해서 아파트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도 기록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신용카드와 금융거래통장의 비밀번호까지 적고 보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훗날 비밀번호를 적은 수첩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비밀번호를 통해야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 편리함과 함께 불편함도 함께 가져다 준다. 씁쓸함이 남는 것은 아마 숫자와 문자를 통해서야 만이 내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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