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살로메칼럼
한때 오십 만부 이상이 팔릴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을 낸 시인은 여전히 가난했다. 살던 월세방을 비워주고 새 거처를 구해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될 만큼 시인의 벌이는 시원찮았다. 이사라면 지긋지긋했던 시인은 자주 드나들던 호텔에 전략적 제휴를 제안한다. 평생 호텔 홍보를 해줄 테니 방 하나를 일 년간 사용하게 해달라고. 특급 호텔이어야 하고 수영장이 있으면 더 좋다고 했다. ‘아무 곳에서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라고도 했다. 그 사실을 자신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통해 공개했다. 네티즌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공짜로 방을 원한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한국 사람들은 울 줄은 아는데 웃을 줄은 모른다며, ‘행간의 위트도 읽지 못한다.’며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며칠 간 인터넷 상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해프닝이다. 우선 가난이라는 물리적 현상 앞에서 힘겨워할 시인을 이해한다. 하지만 시인의 지나친 당당함이라는 네티즌들의 비판에도 동조한다. 열린 시각의 소유자인 것처럼 스스로를 믿어온 것을 의심해야 할 만큼 온전하게 시인의 입장만을 편들 지는 못하겠다. 그러한 제안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백번 양보해 이판사판의 도발을 보여준 시인의 상상력이 아무리 자유롭다 해도 그것이 특권의식에 맞닿아 있는 것은 부끄럽기까지 하다. 시인의 유명세와 재능을 쾌적한 주거환경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재기발랄한 시적 담보는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쉽게 현실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원하지는 않는다.
롤스가 저 말을 한 것은 물론 많이 가진 자가 아주 적게 가진 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하지만 덜 가진 자가 더욱 덜 가진 자의 박탈감과 허탈감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천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혜택 받지 못한 계층을 아우르지 못하는 발언들은 공감보다는 공분을 사기 쉽다. 그 논란의 중심에 ‘아무 곳에서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라는 발언이 있다. 참신한 시인의 제안을 백 번 이해한다해도 위 발언만큼은 신중하지 못했다. 시인이 생각하는 기준의 ‘아무 곳에서나’ 사는 사람들은 생각 외로 많다. 호텔 홍보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제안할 처지조차 못 되는 숱한 약자들의 우울감은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힘들어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저 묵묵히 주어진 삶에 충실할 뿐이다.
이번 해프닝을 보면서 문학인의 포지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전업작가들 대부분은 가난에 시달린다. 연봉 이백만원이 채 못 되는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배우자를 비롯해 실제 가족의 도움 없이는 작가의 길을 지탱할 수 없다. 글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고, 문학 언저리에서 허드렛일을 해도 자신의 수입만으로는 생계유지가 곤란하다. 그렇다고 문학인의 가난이 당연시 되고 배려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인이나 예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나은 포지션이 주어지기를 바라서는 곤란하다. 사회적 혜택이나 포지션이 주어지리라는 기대에서 자유로울 때 진정한 문학인의 포지션을 얻는다. 다만 노력했음에도 비루함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모든 경제적 약자들에게 시스템 상의 배려가 있기를 바랄 뿐. 복지 정책이 문학인을 비롯한 예술계 전반 나아가서 약자 전체를 위한 시각으로 끊임없이 진화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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