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랭 루주’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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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랭 루주’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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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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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작가
MZ세대의 할머니들은 80대 이상이다. 많은 이가 이미 딴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 할머니 세대가 사용한 외래어 중에는 프랑스어가 더러 있다.

‘루주’(rouge)

그 할머니 세대는 립스틱을 ‘루주’라 불렀다. 그 시대의 립스틱은 99.99%가 붉은색 계열이었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 여성이 입술에 루주를 바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루주는 여성성(性)과 이음동의어였다.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루주’를 만난 것은 캄보디아의 공산정권 크메르 루주(Khmer Rouge)다.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는 4년 동안 150만명 이상을 학살했다. 영화로도 나온 ‘킬링필드’다.

우리나라에 극장식 식당이 본격 유행한 것은 1970년대다. 가수, 코미디언 등이 무대에 섰다. 노래와 쇼와 코미디가 결합한 극장식 식당의 절정기는 1980년대 초반이 아니었을까.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무랑 루주’와 ‘초원의 집’이었다. 그 무렵 신문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코미디언 이주일, 가수 조용필·인순이의 얼굴이 크게 실린 광고가 실리곤 했다.

세 번째로 ‘루주’와 만난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무랑 루주’가 빨간 풍차라는 뜻이고, 프랑스 파리에 ‘물랭 루주’라는 극장식 식당이 있다는 걸 알았다. ‘무랑 루주’에서 “못생겨서 죄송하다”는 이주일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못한 채 무대는 사라졌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한국인의 영순위 여행지는 단연 프랑스 파리다. 파리를 찾는 여행객들은 낮에는 대부분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이나 오르세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럼 밤에는? 직업과 나이와 피부색을 불문하고 남자들은 몽마르트르의 ‘빨간 풍차’로 몰려갔다. 파리의 나이트 라이프는 빨간 풍차와 함께 익어갔다. 세계의 남자들은 몽마르트르에 감도는 보헤미안 분위기에서 어떤 판타지를 품었다.

몽마르트르로 가는 관문이 피갈역과 블랑쉬역이다. 이곳 주변에는 판타지를 가진 세계 여행객들의 지갑을 노리는 바가지 술집들이 널려 있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공연히 호기를 부렸다가는 종종 ‘봉’이 되곤 한다. 청구서에 찍힌 동그라미 숫자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든다. 스트립쇼를 보고 술 몇 병을 마셨을 뿐인데. 그러나 그때는 이미 상황 끝. 조폭 스타일의 종업원이 문신 팔뚝에 힘을 주며 험한 눈알을 굴리면 카드 결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랭 루주’의 야경. 사진= 위키피디아 뉴스1
‘물랭 루주’의 야경
리비도를 자극하는 쇼! 쇼! 쇼!

물랭 루주의 나이는 에펠탑과 같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인 1889년에 세상 빛을 봤으니 어느덧 132살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고조할머니뻘이 된다. 그런데도 물랭 루주는 여전히 젊고 신선하고 윤기가 흐른다. 물랭 루주가 파리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1907년 여장남자가 출연해 ‘이집트의 꿈’이라는 공연을 하면서다.

물랭 루주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공로자는 ‘비운의 화가’로 불리는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 이 술집의 단골손님이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는 무희들을 모델로 홍보용 포스터를 그린 것이 히트를 하면서 물랭 루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후 물랭 루주는 올랭피아(Olympia)와 함께 파리 나이트 라이프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물랭 루주의 쇼를 페리(Feerie)라고 한다. 실내 색조는 온통 붉은색이다. 기둥과 벽면에 붙은 로트레크의 포스터들은 강렬하게 노스탤지어를 소환한다. 페리 쇼는 관능의 축제다. 최소한 가리고 최대한 드러낸다. 식욕과 리비도를 동시에 자극한다. 1장 물랭 루주의 오늘과 어제, 2장은 해적, 3장은 서커스, 4장은 1900년부터 현재까지.

그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캉캉 춤. 캉캉춤의 원조는 물랭 루주가 아니었지만 캉캉춤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곳은 물랭 루주다.

132살의 물랭 루주는 스타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다. 전설적인 배우 장 가방도 물랭 루주에서 데뷔해 잔뼈가 굵었다. 이들 중 빠트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 에디트 피아프(1915~1964)다. 열다섯 살부터 거리의 가수로 나서 피갈(Pigalle)역 일대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노래를 부르던 피아프. 그가 천신만고 끝에 스타덤에 올라 최고 대우를 받으며 무대에 선 곳이 바로 물랭 루주였다. 19세기나 21세기나 최고스타는 쇼 프로그램의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 에디트 피아프는 물랭 루주를 비롯한 유명 극장식 식당의 간판스타였다.

파리가 나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44년 봄, 그는 물랭 루주에 막 데뷔한 마르세유 출신의 이탈리아계 가수를 주목한다. 목소리 좋고 키 크고 잘생긴 신인가수에게 일류 작곡가를 붙여주고 매니지먼트를 잘하면 스타로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신인가수의 매니저 겸 후원자를 자처한다. 그는 스물셋 신인가수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이브 몽탕이다.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이브 몽탕은 1년도 안 되어 스타가 된다. 스타덤에 오르자 더이상 피아프 도움이 필요 없어졌다. 영화계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했다. 이브 몽탕은 피아프를 떠난다. 이브 몽탕과 헤어지고 실연의 아픔을 노랫말로 쓴 곡이 ‘장밋빛 인생’이다.

영원한 스토리텔링의 저수지

여기까지는 20세기의 이야기다. 아무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라고 해도 과거의 명성에 머물러서는 새로운 세대를 고객층으로 흡수하지 못한다. 물랭 루주는 전통을 유지한 채 끝없는 변신을 거듭해왔다. 현재는 아쿠아리움 쇼까지 한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물랭 루주는 문을 닫지 않았다. 앞서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의 만남에서 보았듯 나치 점령 기간 중에도 캉캉춤은 계속되었다.

물랭 루주는 스토리텔링의 저수지다. 물랭 루주라는 이름으로 영화와 뮤지컬이 계속 제작된다. 세계인은 영화나 뮤지컬을 접하며 또다시 물랭 루주를 꿈꾸고 판타지를 품는다. 파리를 가게 되면 물랭 루주에 꼭 가봐야지.

‘물랭 루주’의 메뉴는 단출했다. 벨 에포크, 툴루즈 로트레크, 쇼 관람 세 가지가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메뉴였다. 벨 에포크(Belle epoch)는 1880년대부터 1918년 1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 즉 풍요와 자유를 구가하던 시기를 일컫는다. 물랭 루주가 바로 벨 에포크에 태어났다. ‘벨 에포크’는 쇼 관람, 식사, 샴페인 1병이 포함된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쇼와 식사만 제공된다.

코로나로 1년 반 이상 문을 닫았다가 얼마 전 재개관하면서 물랭 루주의 메뉴가 달라졌다. 오후 7시 ‘VIP 디너와 쇼’, 오후 9시·11시 쇼. 이제 ‘벨 에포크’와 ‘툴루즈 로트레크’ 메뉴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쇼를 보든 식사를 겸하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전쟁 중에도 쇼를 올린 물랭 루주였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뮤지컬로도 만들어진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보이지 않는 적이 보이는 적보다 더 두렵고 공포스러운 법이다.” 전쟁도 막지 못한 물랭 루주의 쇼를 눈에 보이지 않은 바이러스가 멈춰 세운 일 년 반이었다. ‘위드코로나’로 세계의 나이트 라이프가 되살아나는 요즘이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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