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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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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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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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공기가 차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오토바이가 손수레를 뒤에 달고 툴툴거리며 온다. 한쪽 팔에 장애가 있는 노인은 자신의 한 몸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는 데다 여든은 되었을 성싶다. 이 집 저 집 쓰고 버린 일상의 빈껍데기를 느릿느릿 주워 모은다. 한 손과 발을 이용해 상자를 접고 테트리스 쌓듯 수레에 옮겨 싣는다. 하루 이틀 만에 생긴 요령이 아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폐지나 스티커를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이 있다. 아파트에 살 적에는 미처 몰랐던 일이다. 종이를 한 수레 가득 꾹꾹 눌러 채워도 고작 이삼천 원 벌이라고 한다. 손수레가 없거나 거동이 느린 노인은 불편한 허리로 길가며 계단 구석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광고 스티커를 줍는다. 천 장을 모아서 가져다주면 단돈 천 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마저도 조금 늦을라치면 당신들의 차지가 되지 못한다.

빈구한 늙음이 어느 날 아침에 뚝 떨어진 건 아닐 것이다. 이른 새벽에 장애의 노구로 폐지를 주워 버는 몇천 원의 수입으로 자신을 먹여 살리는 노인. 굽은 허리로 종일 스티커를 모아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노후. 그들도 누군가의 자식으로 살다가 부모가 되고 노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옛말이 있다. 당신을 돌보지 않는, 당신을 돌보지 못하는 자식들에게 할 말이 없을까마는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가슴으로 삼키고 마는 것은 부모이기 때문이리라.

지난해 시어머니가 뇌졸중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증세가 위중하진 않았지만, 평소 건강했던 터라 적잖이 놀랐다. 짝이 없는 신발을 신고 자식들 건사하며 먼 길 걸어오느라 힘에 부쳤던 것일까. 몇 년 전만 해도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위해 갖가지 채소며 반찬을 알뜰살뜰 보내주었다. 이제 퇴직을 하고 집에 있는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들여다보지 못했다. 며칠 전에는 시어머니의 앞니가 세풍에 동백꽃 떨어지듯 툭 빠졌다. 분명 전조증상이 있었을 터인데 자식들 걱정시킬까 봐서 말을 못 했던 건 아니었을까. 당신은 매양 덤덤한 여장부라고 여겨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게 때늦은 후회로 밀려왔다.

한여름 느티나무처럼 늠름했던 시어머니의 자신감은 모지랑이 숟가락처럼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구멍 숭숭 뒤틀린 뿌리에 찬바람이 수시로 드나들고 주름 성성한 손등, 툭 불거진 힘줄 고랑에 거무스름한 저승꽃이 애잔하다. 한평생 드센 풍랑에 자식들 걷어 먹이랴 눈비 막으랴, 언제부턴가 숨소리마저 바스락해진 당신. 닳아서 속울음도 되알진 관절에서는 온종일 새가 운다. 그런데도 모른 체하는 자식들이 섭섭할 만도 하건만 아무런 말이 없다.

며칠 동안 몸살감기로 끙끙 앓았다.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었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편도염과 근육통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심한 기침으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약기운 때문인지 심신이 병든 닭처럼 처지는데도 힘들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혹여라도 아침 일찍 출근해서 종일 일하다 지쳐서 들어오는 아이들이 걱정할까 싶어 아무 말 못 하고 저녁상을 차렸다. 아픈 것도 미안해지는, 부모는 자식에게 평생 빚진 죄인이라고 했던 생전 엄마의 말이 생각나 그리움과 죄스러움에 울컥 목울음이 올라왔다.

어쩌면 엄마도 그랬으리라. 퇴근하고 돌아오면 직장에서 별일은 없었는지 밥상머리에서 딸의 눈치를 살폈다. 당신인들 어찌 고달픈 날이 없었을까. 꾹꾹 눌러 삼킨 줄도 모르고 천하무적인 양 온갖 투정 늘어놓으며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런데도 한 번도 나무라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그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엄마는 구절초 하얗게 핀 늦가을 저녁에 노랫말처럼 ‘귀하게 대접받으며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붉은 노을 따라 먼 길을 떠났다.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율이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고 한다. 고령인 노인의 삶이 매우 척박하다는 지표이다. 노후의 빈곤은 생계의 어려움으로 직결되고 그로 인한 정서적인 불안감과 낮아진 자존감은 극단의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근래 들어 1인 고령가구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다 보니 노인의 쓸쓸한 고독사가 종종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자식을 위해 헌신했던 당신들의 굽어진 어깨에서 벙어리 새가 운다. 어쩌다 미처 준비 못 한 노후의 빈곤은 거친 숨 내뱉으며 생목숨을 지키려 아우성치는 삶의 슬픈 뒤태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선물이 진짜 선물이 되려면 그것을 받는 사람이 선물인지를 몰라야 한다.’ 고했다. 하지만 나는 그만한 인품도 못 되는 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전날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묶어놓았던 폐상자 뭉치와 라면 한 상자를 몸이 불편한 노인의 수레에 함께 실었다. 할아버지는 연신 손을 내저으면서도 금세 눈자위가 붉어졌다. 몇 푼 안 되는 호의가 어쩌면 당신을 난처하게 한 건 아닌지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폐지를 반도 못 채운 수레가 숨 헐떡이는 오토바이 뒤에 터덜터덜 끌려간다. 노인의 마른 실루엣 위로 아침 여명이 비껴든다. 슬며시 밀려드는 옅은 햇살의 무게마저도 버거운 늙은 파수꾼의 몰아쉰 한숨, 어쩌면 가슴에 깊이 묻어둔 속엣말을 뱉지 못하고 삼킨 묵언의 기도가 아닐까. 벙어리 새의 울음은 또 다른 언어인 것을. 김지희 칼럼니스트


* 박종구 시조집 『벙어리 새』 책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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