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지난지도 닷새나 되건만 유난히도 올 여름 끝은 질기다. 추분(23일)을 며칠 앞두고도 아직 한낮의 기온이 섭씨 30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하늘의 운행(運行)은 어쩔 수 없는 법. 제 아무리 고집스러운 여름이라 해도 아침저녁으로 우리 곁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선선한 가을기운을 어쩌진 못한다. 한여름 맹렬했던 왕매미 울음소리도 멀어져가는 기적소리처럼 기가 꺾이지 않았는가.
`등화가친(燈火可親)’은 어릴 적부터 흔히 들어온 낱말이기에 가을의 대표적 이모티콘이다. 글자 그대로 등불과 친할 만하다는 뜻인데, 등불 아래서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란 말이다. 당나라 시인 한유(韓愈)가 아들에게 책읽기를 권한 시`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란 오언절구에서 유래했다. `가을이 되어 장마도 걷히고/서늘한 바람은 마을에 가득하다./이제 등불도 가까이 할 수 있으니(등화초가친:燈火稍可親)/책을 폄이 옳지 않겠는가.(간편가서권:簡編可舒卷;)’
추석 쇨 걱정으로 시작된 구월, 그 추석을 쇠자마자 미국발 금융위기가 요 며칠 서민들 대다수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그 사이 구월도 어언 하순에 들어선다. 가을의 문턱이 그 이름 같지 않게 덥고 나라 경제 형편마저 짜증스럽기만 하니 사람들의 가슴엔 가을감상(感傷)도 실종되었는지 시민들 표정에서 가을을 누리려는 낭만을 찾아볼 수 없다. `낭만 없는 가을!’ 참 삭막하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구월엔 배가 부르고, 아무리 모진 사람도 구월엔 시를 읽고, 아무리 외로운 사람도 구월엔 친구가 많다.’고 누군가 말했다. 바야흐로 등불과 책을 가까이 할만한 `등화가친’의 계절이다.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면 책으로 벗을 삼고, 가난이 서러운 사람이면 독서로 허기를 잊으며, 행여 이것저것 못 견디게 짜증스럽기만 한 사람이라면 향기로운 글 읽는 일로 편안한 마음 가져보는 멋도 괜찮은 가을낭만이지 싶다.
정재모/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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