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에릭 클랩튼의 ‘Unplugged’를 들으며
-언플러그드 라이브 앨범
말끔한 검은 정장차림에 기타를 안은 이 남자,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둥근 뿔테 안경을 쓴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차림으로만 보면 그다지 열정적인 연주를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저 해야 할 동작을 근근이 해내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노래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하듯이 입을 벌리고, 숨도 적당히, 고개 짓도, 발 박자도. 그렇게 한 시간여 동안 자신의 평소 습관 속에서 절제된 연주를 해나갈 테다.
그렇다고 활기가 없다는 건 아니다. 솟구치는 환호를 들으면 알 수 있다. 모든 액션은 리액션이 만들어내는 판타지에 힘을 얻는다. 무대 위에는 몇몇 악기만이 존재하고, 관객, 그렇다 그곳에는 관객이 있다. 앞인지 뒤인지, 혹은 무대를 빙 둘러싸고 있을 것 같은 관객이 거장의 목소리에 맞춰 고개를 흔들다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며, 리듬을 더하고 있다.
이 라이블 앨범의 주역은 관객이다. 악기들이 비는 틈을 찾아낸 한 관객은 기이하게도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낸다. 소리는 밉지 않다. 오히려 여백과 틈과 공백과 공허를 폭넓게 메우는 기분이다. 듣는 행위만으로도 적절한 분위기와 온도 속에서 무대가 달궈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1절과 2절 사이에 흘러나오는 에릭의 솔로 연주는 또 하나의 목소리다. 기타의 연주에는 관객의 호응이 묻어난다. 무대와 객석의 폭은 크지 않을 것이다. 언플러그드라 붙인 제목답게 소극장에서 은밀하게 공연되는 한 편의 연극이라 해도 좋겠다.
-땅큐
학창시절부터 들어왔던 이 앨범을 영상으로 본 것은 인터넷 플랫폼이 대중화되는 시점이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재킷 사진으로 얼마간은 상상할 수 있었지만 영상으로 만난 에릭 클랩튼은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감정의 노출에 주저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지만 더없이 자유로워보였고, 황홀에 빠진 자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작은 의자에 앉은 그의 다리는 이리저리 움직이고 기타는 아래위로 들썩이며 얼굴은 마이크에서 멀어지다 가까워졌다. 관객은 상상했던 것보다 정중하게 공연관람을 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던 소리의 정체도 살필 수 있었다. 카주와 만돌린과 트빌라 같은 악기들은 직접 보지 않으면 발견해내기 힘든 것들이었다. 공연장의 조명과 악기와 악기 사이의 간격과 연주자들의 표정 역시 소리만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역시나 문제는 귀보다 눈에 더 많은 에너지를 뺏긴다는 점이다. 무엇이 낫다고 할 수 없다. 눈과 귀의 일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Signe
이 앨범은 제목처럼 전자악기를 제외한 소리들로 진행된다. 탬버린과 하모니카와 트라이앵글과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는 통기타와 더욱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내가 이 공연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아무래도 첫 곡(Signe)이다. 아무래도라고 쓴 이유는 어떤 앨범에서건 막 문을 열고 느끼게 되는 첫 감정이야말로 그 앨범의 전체를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제목을 번역하자면 기미, 몸짓, 제스처 정도가 되겠다. 재밌는 것은 첫 곡이 시작되기 전 몇몇 잡음을 은밀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연주를 시작하기 전, 조율을 하고 톤을 맞추고 사인을 던지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일련의 준비 동작들이다. 에릭 클랩튼은 ‘자아, 그럼.’ 하는 말을 연주자들에게 건넨다. 그리고는 준비한 첫 사운드를 펼쳐나간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언플러그드한 세계, 그가 초대한 깊고도 은밀한 소극장의 객석으로 들어서게 된다.
무대는 단출하나 깊고 짙다. 당신의 박수 소리에 맞춰 연주자들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다. 앞장 선 이가 에릭 클랩튼이다. 박자에 섞어내기만 한다면 당신이 무슨 소리를 내건 상관없다. 그의 연주가 시작되고, 노래가 시작되면 당신은 단번에 빨려 들어가 잠시 음표 속을 서성이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한동안, 아니 공연이 끝날 때까지 톤암을 들어 올리는 일은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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