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첼리스트를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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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천재 첼리스트를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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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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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
자클린의 눈물

 

김일영 포항유스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김일영 포항유스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꼭 알아야 하는 곡

1992년 여름, 필자는 병역의 의무를 의무경찰로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고 있을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군대에서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특수한 군복무제도가 있다. 당시 필자는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음악 학도였기에 전공을 살리고자 들어가기 어렵다라고 소문난 국립경찰교향악단에 합격하여 음악공부를 중단하지 않고 군복무를 잘 마칠 수가 있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1992년도 늦은 여름일 것이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배일환 교수님(이화여자대학교)과 함께 공연을 한 이야기이다. 특이하게도 그때 우리나라 초연이라며 필자도 알지 못하는 처음 듣는 작품을 연주한 기억이 있다. 처음 듣는 작품이라 설래기도 했지만 단번에 너무 아름답고 슬픈 노래이구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음악은 조금씩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몇 번 전파를 타다가 지금은 한국인이라면 한번은 들어봤을 법한 매우 친숙한 멜로디가 되어버린 작품이 있다. 바로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작품인데 지금은 서양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욱 인기가 있어 매우 유명한 음악이 되어버렸다. 1995년 인기드라마 ‘옥이 이모’ 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었고 2008년 음악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에서는 입양아로 세계적인 음악인 반열에 오른 비올리니스트 ‘리차드 용재 오닐’이 연주하여 이작품의 유명세는 더욱 커졌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작품이 큰 인기가 있었던 것은 한을 안고 평생 살아야했던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우리의 정서와 비슷하게 맞았기 때문에 이런 슬픈 음악이 더욱 쉽게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았나라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오늘은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작품과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자클린의 눈물’이 되었는가라는 이야기를 해본다.



□이렇게 슬픈 이야기가!

1967년 영국, 클래식음악계의 세기적 결혼식이 있었다. 영국의 슈퍼스타 천재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1945-1987)와 촉망받던 젊은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의 결혼식이 있었다. 뒤 프레의 집안에서 완강히 반대를 무릅쓰고 거행된 세기의 결혼식이라 모두들 슈만과 클라라를 비유하듯 오랫동안 사랑을 지키며 아름다운 결혼생활이 되기를 사람들은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길지만은 않았다.

슈만과 클라라도 반대하는 결혼을 했지만 슈만은 정신병으로 결혼생활이 파탄 났듯이 자클린 뒤 프레의 결혼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혼 후 5년 뒤에 1971년 ‘다발성 뇌척수 경화증’의 병명으로 1973년(28세 때)부터는 그녀의 연주활동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오랜 병마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천재 첼리스트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린 나날들을 보내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즈음 남편인 바렌보임은 ‘자클린 뒤 프레’를 두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비정하게도 아내와 결별을 선언한다. 이후 그녀는 홀로 병마와 싸우며 1987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과 이별하게 된다. 그녀의 죽음도 죽음이만 그녀를 더욱 안타깝게 한 것은 병세가 위독했을 때도,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녀의 무덤에 단 한 번도 찾지 않은 남편 ‘바렘보임’의 행동이었다.

러시아출신 피아니스트인 ‘바쉬키로바’(Elena Dmitrievna Bashkirova)와 부적절한 관계로 두 아들까지 낳았고, 결국 ‘뒤 프레’에게 강제 이혼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자클린 뒤 프레’는 죽을 때까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혼을 거부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하며 주변에 자주 묻기도 했지만 그녀는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문턱에서의 위안은 그저 지난 세월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녹음을 작업을 했던 음반을 하루 종일 들으며 한없이 눈물만 흘리는 것 밖에 없었다. ‘바렌보임’은 병사한 조강지처의 임종과 장례식에도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고 무덤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자클린 뒤 프레’의 죽음을 기다렸다는듯이 1988년에 ‘바쉬키로바’와 재혼했다. 오늘날 명지휘자 바렌보임에게는 음악적 성공의 명예도 있지만 조강지처를 버린 인간이라는 지탄도 동시에 받고 있어서 “기회주의자”라는 불명예가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부부의 듀엣 연주, 세기를 뛰어넘는 음반으로 남다

자클린 뒤 프레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재성을 입증 받아 이미16세에 세계적 천재 첼리스트로 자리 잡았다. 그녀의 나이 21살 때 BBC교향악단과 미국연주여행 때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대 유행을 만들 정도로 그녀의 연주 실력은 대단했다. 남편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났을 때 그녀의 남편은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지만 항상 동문이었던 명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그늘에 가려져 늘 2인자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1966년에 이 둘은 만나 6개월이라는 짧은 연애기간으로 결혼을 하게 되고 그녀는 남편의 내조를 위해 헌신을 하게 된다. 결혼 후 ‘자클린 뒤 프레’와 남편인 ‘바렌보임’은 부부이상의 음악적 동반자로써 첼로의 명곡을 함께 연주하였는데 ‘바렌보임’은 피아노를, ‘자클린 뒤 프레’는 첼로를 연주하며 수많은 명 음반을 남기고 오늘날까지도 이 둘의 아성은 깨지 못하는 명 음반들이 되고 말았다.



□오펜바흐의 보석

‘자클린의 눈물’은 호프만의 이야기, 천국과 지옥(캉캉)으로 유명한 프랑스 ‘오페레타’(오페라의 축소형, 작은 오페라)의 창시자 독일 태생 프랑스 작곡가이자 첼리스트인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의 미발표된 작품이다. 약100년 동안 잊혀진 작품이 독일 출신 첼리스트 ‘베르너’에 의해 발굴되어 그가 직접 ‘자클린의 눈물’ 로 이름 붙여 연주하여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안타까웠던 비운의 천재 첼리스트를 기원하고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베르너는 그녀에게 바치는 헌사(hommage)라고 하여 ‘자클린의 눈물’이라고 제목을 지었다.

‘자크 오펜바흐’ (Jacques Offenbach 1819-1880)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오페레타 작곡가였다. 독일출신이지만 14세에 파리로 이주하여 파리 음악원에서 첼로를 배운 뒤에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첼로 연주가 이며 작곡자로 알려져 있으며 극장경영자였다. 대표작으로는 캉캉으로 유명한 <천국과 지옥>, <아름다운 엘레느>, <호프만 이야기> 등이 있다. 본명인 “야콥 레위 에베르스트” 보다 별명인 “자크 오펜바흐”로 더 유명하다.



□다가올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자클린의 눈물

이 작품 ‘자클린의 눈물’은 약6분 정도의 첼로 소품이다. 최근에는 많은 첼로연주자들이 단골레퍼토리로 자주 연주되고 있다. 이 작품을 감상해본다면 슬프고도 가슴 아픈 한 연인의 인생의 이야기가 있어 곧장 감정이 복 받아 오른다. 첫 소절만 들어도 누구나가 들어 봄직한 이 유명한 멜로디는 한 맺은 슬픔이 있다. ‘자클린 뒤 프레’가 태어나기전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사실 그녀의 슬픈 인생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을 끝가지 감상해본다면 굳이 ‘자클린 뒤 프레’의 슬픈 이야기의 음악이 아니라 마치 우리네 인생 이야기와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이 음악을 들을 때면 더욱 처절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슬픔이 있어 힘겨운 고통을 느끼고 행복했던 추억이 있어 오늘을 이겨내는 현대인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잘 이해해주고 어루만져주는 흙속의 진주 같은 힐링의 명작이다. 이곡을 들으며 잠시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자. 지나간 사랑의 아픔이 크면, 다가올 사랑의 기쁨은 더 크게 느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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