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경시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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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경시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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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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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서울시내 버스 정류장에 ‘마시는 식사’ 광고가 대대적으로 나붙은 적이 있다.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 변요한을 모델로 내세웠다.

‘잘나가는 이 남자 밥 마시다’

간편하게 마시는 한끼 OOO. 바쁘면 밥은 마셔야지.

‘이 남자 밥맛이다’라는 구어체를 살짝 변형해 ‘이 남자 밥 마시다’라는 카피를 만들었다. 나름, 머리를 쓴다고 쓴 광고였다.

온라인의 광고에서는 이런 설명이 나온다.

‘OOO는 끼니를 간편하게 챙기고 자기계발에 더욱 집중하고 싶은 현대인들, 충분한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새로운 식사를 개발했습니다. OOO 푸드 셰이크는 물을 붓고 흔들어 간편하게 마시는 형태의 식사로 식사를 준비하고 챙기는 일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대안을 제공합니다.’

‘마시는 밥’ 광고를 보면서 저 음료 상품을 개발하는 데 투자한 사람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 있었더라면···.

인간의 유전자는 액체를 마시는 것으로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게 진화해왔다. 액체를 마시게 되면 씹을 필요가 없어진다. 씹을 필요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인류학자들은 두개골과 치아를 연구한다. 인간의 치아는 음식물을 씹어 먹는 저작(咀嚼) 운동을 통해 뇌에 자극을 준다. 음식물을 잘게 씹고 끊어 부숴 먹는 것은 영장류와 인간을 구분하게 만든다.

51세에 메이저대회 우승을 일궈낸 프로골퍼 필 미컬슨. 프로골퍼의 전성기는 20~30대다. 그가 51세에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자 체력 비결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50세 청년 시대가 열렸다는 해설도 보였다. 젊게 사는 여러 가지 비결 중 미컬슨은 껌을 자주 씹는다고 말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껌씹기가 뇌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한 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씹는 행위가 뇌 혈류를 최대 40% 늘려 집중력을 높이고 뇌를 젊게 유지한다는 연구가 오래전에 나오기도 했다.

아침 식사로 주로 먹는 수프나 떠먹는 요구르트가 ‘마시는 식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따끈한 수프를 먹을 때도 씹어 먹을 수 있는 빵 한 조각 정도는 있어야 한다. 떠먹는 요구르트도 씹히는 과일 조각이 몇 개는 들어 있어야 팔린다.

미국은 왜 핵무기를 쓰기로 했을까

클린트 이스트우트가 감독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硫黃島から手紙). 2016년에 나온 이 영화는 2차세계대전의 실화를 다뤘다. 이오지마는 일본 도쿄 남쪽 해상 오가사와라 제도에 있는 섬. 휴양지인 사이판과 도쿄의 중간 지점이다.

1945년 3월, 미국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작전을 전개한다. 이 영화는 미 해병대와 일본군의 전투를 철저하게 일본군의 관점에서 묘사한다. 주연과 조연이 대부분 일본 배우들이다. 이 영화는 2차세계대전 막바지 왜 미국이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포기하고 핵폭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오지마 상륙작전에서 미군은 5000여명, 일본군은 2만2000여명이 각각 전사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단일 전투에서 희생이 컸다. 이오지마에서 일본군이 미군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본토에 전해지자 1억 옥쇄론(玉碎論)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미군이 본토에 상륙하면 일본인 1억명이 죽창 들고 달려들겠다.”

전쟁에서 죽기로 결심하고 달려드는 적을 이길 수 있을까.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울자 미군 전쟁지휘부는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최대한 빨리 일본이 항복하게 해야 미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 해군은 해안을 봉쇄해 보급로를 끊으면 일본이 항복한다는 봉쇄론을 폈고 육군은 본토에 지상군을 상륙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미군이 본토 상륙작전을 전개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보듯 일본군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저항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미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을 게 뻔하다. 훨씬 더 많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희생당했을 것이다. 미군은 핵무기 카드를 꺼냈다. 그것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배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비교 자체가 안 되는 막강한 화력을 쏟아붓고도 미국은 왜 패배했을까.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은 군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전쟁이었지만 초강대국 미국은 패배했다.

베트남전쟁을 지휘하는 백악관 지휘부는 하버드대 출신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거지 군대’라고 부르며 폄훼했다. 그런데 미국은 그 ‘거지 군대’에 패배했다. 인문 교양이 결여된 기능주의자, 과학만능주의자들끼리 숙의했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보고 무시했을 뿐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베트남전쟁과 대비되는 게 위에 언급한 태평양전쟁이다. 미태평양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를 보좌한 인물 중에 보너 팰러스(1896~1973) 준장이 있다. 그는 태평양 사령부의 심리전 책임자였다. 그는 전쟁이 터지기 전 필리핀에 근무하면서 일본인의 심리연구를 진행해왔다.

1934년 그는 보고서 ‘일본 병사의 심리학’을 썼다. 이 보고서에서 팰러스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전황이 불리해지면 일본은 자살 특공대 같은 것을 조직해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일본인 연구를 하면서 일본인과 일왕과의 관계, 일본군의 군율(軍律)에 흥미를 느꼈고 일왕이 차지하는 상징성을 정확히 간파했다.

1944년 여름, 팰러스는 ‘일본에 대한 해답’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유럽 대륙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갔고 태평양전쟁도 일본에 불리하게 전개되는 시점이었다.

“일본인들은 철저한 군사적 재앙과 그로 인한 혼란을 겪어야만 오로지 그들만이 아시아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우수 민족이라는 맹목적 사상 주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패배와 엄청난 규모의 피해만이 일본인들에게 전쟁 기계도 패할 수 있음을 눈먼 지도자들이 재앙의 길로 몰고 갔음을 가르쳐 줄 것이다.”

펠러스의 보고서대로 미국은 본토 상륙 대신 핵무기를 사용했다. 히로히토 일왕을 대리한 일본 최고지휘부가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자 일본군은 일제히 무기를 놓았고 전쟁은 끝났다. 조선도 해방되었다.

펠러스 보고서는 미국이 전후 일본을 통치할 때도 유효하게 반영되었다. 일본인과 세계의 관심은 일왕이 과연 도쿄전범 재판에 기소될 것이냐 여부였다. 1946년 10월, 팰러스가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자.

“일왕의 명령 한마디로 700만 병사가 무기를 내려놓고 무장 해제를 했다. 그의 행동 하나로 수십만 미군이 목숨을 건진 것이며 생각보다 빨리 전쟁이 끝난 것이다. 만일 일왕이 전범으로 기소된다면 정부 구조는 붕괴될 것이며 대대적 동란은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일왕은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미국은 일왕을 움직여 통치 비용을 최소화했고 일본을 유라시아대륙의 공산주의팽창에 대항하는 자유진영의 방파제로 삼았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출간되기 전이다.

가끔 오래된 미래예측서들은 들춰 보다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왜 미래예측은 어처구니없을까. 미래예측의 상당수는 기술이 사회변화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기술결정론에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상수를 배제한 채 미래예측을 한 결과다.

심연보다 캄캄하고 변화무쌍한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셰익스피어는 MZ세대에게 고리타분하게 비친다. 그런데도 400년 전 인물 셰익스피어는 틈만 나면 소환되고 여전히 리바이벌된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예언이며 인간의 어리석고 나약한 본성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시대를 종말을 가져온 게 1812년 러시아원정과 뒤이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의 패배다. 두 전쟁에서 러시아군과 반프랑스연합군은 각각 나폴레옹과 맞붙는 것을 피했다. 싸우지 않고 이겨버린 것이다. 전쟁사 연구자들은 두 전쟁의 최고 지휘자들이 ‘손자병법’을 정확히 이해한 것으로 해석한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손자병법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심리전이다.

레고는 단순 장난감이 아니다. 세계 어린이들의 영원한 놀이기구다. LEGO는 어떻게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어린이는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마케팅론 관점이다. 하지만 인문학적 접근법은 다르다. 묵직하다. LEGO는 인문학적 관점을 받아들였다.

‘아이들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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