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디제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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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디제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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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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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 LP
디제이와 음악



디제이의 목소리

당신이 만약 운전자라면, 어느 시간대의 라디오를 선호하시는지요. 선호하고말고 따위란 없다, 해야 하니 할 뿐이다, 라고 말하는 분도 물론 계시겠지요. 모두가 원해서 운전을 한다면 도로는 제법 다른 형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여섯 시를 좋아합니다. 배철수 아저씨가 한결같은 목소리로 저를 반겨주기 때문입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일과를 마친 노동자에게 아저씨의 목소리는 난롯불에 한참 끓인 보리차 같은 구수함과 정겨움이 있거든요.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또 어떻습니까. 감각이 생경해지는 해 질 녘에 한결 같은 톤을 가진 디제이가 좋은 음악을 틀어주고, 가끔 음악에 대한 설명도 해주고, 또한 그 음악을 함께 즐기고 있다는 기분을 공유하는 일. 오늘 하루도 무사했다, 베테랑 디제이의 목소리에서 삶의 위안을 얻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운전할 맛

정오는 또 어떤가요. 한 소설가의 위트에는 바로 곁에 있는 듯 한 뭉근한 온기가 담겨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정오의 외출을 선호하진 않지만,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경우는 달라지지요. 12시의 다정한 목소리란 들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소설을 읽어줄뿐더러 삶의 빈틈도 발견해줍니다. 간혹 등장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목소리도 참 반갑습니다. 정말 카페에 온 것 같아서요, 제가 카페인인 걸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운전할 맛이 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자정은 어떠합니까. 저는 한 시인과 담백한 시간을 보냅니다. 시인은 시를 읽어주고, 가끔 가사를 매만지기도 하며,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외로움을, 괴로움을 함께 품어주기도 합니다. 12시라, 0시라 읽어도 좋을 그 시간만큼은 결코 시시해지지 않습니다. 하루를 잘 보냈다는 실감과 동시에 다음 날의 상념이 침투하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흘러나오는 친숙한 음악은 덤입니다. 때로는 덤이 알맞음을 이깁니다. 넘쳐서 좋은 경우는 음악에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넘치지 않은 경우라도 음악을 적극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사실 음악은 어떤 경우라도 좋지만, 자정이 되면 특별히 신비로워집니다. 자정에 시를 읽는 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한 시인이 자정 무렵에 시와 음악을,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생각만으로도 좋지 않나요.



속도를 가진 것들은 슬프다

이러한 주파수 속에서 저는 운전을 합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속도를 가진 것들은 슬프다>라는 책을 준비 중입니다. 저는 속도라는 개념이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운전을 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속도 위에 있는 거잖아요. 제 말뜻을 받아주신다면, 슬픔 위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속도란 속력과 달리 이동한 방향을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수많은 주파수 중 하나가 내게 왔듯, 그들의 목소리가 내게 왔듯, 슬픔도 기쁨도 모두 나에게로 방향을 가진 채 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이지만, 속도를 가진 것들이 모두 슬프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속도를 가진 것들은 가끔 슬프다>로 바꾸면 어떨까요. 제법 슬프다는 단어는요.

우리 이렇게도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의 디제이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음악을 선곡하는 것입니다. 그곳으로 주파수를 보내고, 노곤함을 나누고, 악수를 청하는 일. 그건 어떤 의미로는 사랑이 아닌가요. 그래서 이렇게도 한번 지어보아요. <주파수를 가진 것들은 슬프다>

디제이가 음악을 선곡하고 틀어주는 행위에는 얼마간의 사랑이 담겨있기 마련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위의 세 방송을 들어보세요. 며칠 후에는 당신이 디제이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영 주파수가 슬퍼지는 경우는 없겠습니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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