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낙수(落穗)
  • 경북도민일보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낙수(落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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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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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옥근/의학박사
 
 /빈방에 홀로 앉았으니/늙어감이 서러웁다/밖에는 찬비가 내리고/어디선가 벌레가 방안에 들어와 운다.
 격조 높은 산수화로도 유명했던 당나라 때 시인 왕유는 깊어가는 가을을 이렇게 노래했다. 폭염 한더위 땐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던 비가 생뚱맞게 스리 연일 찬비가 내리더니 급기야 `산산’이름의 태풍으로 변했다. 이름이 `산산’이라 산산조각 날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가볍게 지나간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갑자기 추워졌다. 비가 내리니 울어대던 풀벌레 소리가 빗소리에 그만 놀랐는지 비가 그치니 또 처량하게 울어댄다. 예보에는 평년보다 5도 이상 떨어진 날씨로 한 달 후에나 볼 수 있는 기후란다. 올가을은 이렇게 심통 부리며 시작하는 모양이다. 멋쟁이 아가씨들은 이러다간 올 가을 패션에 맞추어 미리 준비해 놓았던 옷도 입을 사이 없이 겨울이 올까 걱정이겠다. 가을은 우리들의 감성의 각을 세우는 절기임에 틀림없나 보다. 풀벌레 우는소리에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고, 포도 위를 구르는 낙엽에도 애상(哀想)에 잠기니 말이다. 풀잎이 가을을 만나 빛을 바꾸고, 나무가 가을을 만나니 이파리를 벗는구나! 강가에 떼를 지어 놀던 오리 떼들도 둑에 올라와 지는 석양볕에 고개를 날개깃에 파묻고 괘괘괘괘 저희들끼리 하는 소리도 애처롭게 들린다. 
 릴케는 주여! 어느덧 가을입니다/ 지나간 여름은 위대했습니다/ 태양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눕히고/ 광야로 바람을 보내주옵소서/ 일 년의 마지막 과실이 열리도록/ 따뜻한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베풀어 주소서!/ 과실이 익을 대로 잘 익어/ 마지막 감미가 향긋한 포도주에 깃들을 것입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는 결실의 계절이다. 해년마다 여름철이면 그랬듯이 올해도 태풍으로 물바다가 되었던 곳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천형(天刑)이나 당한 듯 말을 잃었고, 숨 막히는 무더위가 급습 할 때는 천지가 다 타들어 간다고 야단법석이었지만 올해도 예년에 없는 풍년이라니 풍년가나 불러야겠다.
 무겁게 머리 숙인 황금 빛 벼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다. 파란 하늘 아래 누런 들녘, 사과는 수줍은 새댁처럼 얼굴을 붉히고, 고추는 지붕에서 새빨갛게 더 익어간다. 검붉은 포도송이, 노란 감귤향기가 그윽하다. 가을은 색의 향연이다. 가을은 실록의 계절 여름처럼 녹색 일변도나, 봄철에 `삐까번쩍’하는 일년초 꽃 색과는 비견 할 수 없이 확연히 다르다. 여기에는 세월이 보이고 풍상이 스쳐간 자욱이 남아있고 느림의 미학을 느끼게 하는 원숙함이 내보이고 태고의 색이 깊숙이 숨어있다. 시원한 바람이 이는 가을들판위에 살가운 바람이 이는 산하를 볼 때마다 흐뭇하기만 하다. 봄, 여름 흘렸던 땀이 있었기에 기쁨과 행복은 당연한 결과리라. 똑같은 시도 가을에 다시 읽으니 그 맛이 더욱 상큼해 물이 뚝뚝 떨어진다. 시의 색깔도 틀리나 보다. 가을에는 모두 시인이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시취(詩趣)가 생기는 계절.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나를 깊이 바라 볼 수 있는 계절이기에 그동안 색종이 곱게 접어 책갈피 갈피 마다 찔러 놓았던 추억들을 펼쳐 보며 작은 미소로 답한다. 가을을 누가 상실의 계절이라고 했나.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라 누가 말했나. 창문을 반쯤만 열고 가을 소리를 들어보라! 낙엽 지는 소리만 들려온다는 사람은 분명 청형(聽熒)들어도 뜻을 모름임에 틀림없다. 가을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빼앗긴지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다. 가을은 모든 것이 쇠하여 지고, 떨어진 조령(凋零)의 계절만 보았지 수확의 가을을 못 보고 하는 괜한 소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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