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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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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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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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근
의학박사
 
 이번처럼 유난히 길었던 추석 명절을 보내면서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이 하나 있다. 나 같이 생활이 단조롭고 행동반경이 좁은 사람은 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오히려 더 고단해 지는 것을 알았다. 하기야 어떤 사람도 일상은 벗어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월 한 차례씩 손자들을 데려와 할아버지 할머니께 대리 효도 한다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퇴행성관절염이 심해 졌으니 다음번에 데리고 오너라’ 해놓고 추석에 모두 쳐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또 말릴 수 있단 말인가.  오랜만에 만난 손자 녀석들이 그 동안 너무 많이 커져서 업어주고 안아주기조차 힘들어 졌다. 그 녀석들은 좋다고 이리 뛰고 저리 밟고 돌아다닐 때마다 밟힌 곳이 여간 아픈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번에는 오래간만에 보는 귀여운 녀석들을 옆에 못 오게 할 수는 없는 일. 옛날 이웃에 가까이 지낸 어느 노인이 “오면 반갑고 빨리 가주면 더 고마운 것이 손자야” 했던 말이 생각나게 한다. 며칠을 손자 녀석들하고 방구석에서 헤매다 보니 권태롭기 그지없다.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이 참으로 무료하기만 하다. 나는 등산복을 갈아입고 `추석날에 어디를 가느냐’ 묻는 식구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대꾸 없이 혼자 뒷산을 향했다. 산 중턱에는 군데군데 벌써 낙엽들이 떨어진 잡목들도 보인다. 까실까실한 가을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참으로 홀가분하고 자유스럽다. 왜 내가 바보스럽게 집에서만 죽치고 앉아 있었을까. 후회마저 들었다. 따분했던 생각들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상명(爽明)한 가을 날씨 속에 하얀 구름 한 점이 정처 없이 떠나간다. 검은 염소 한 마리가 얼마나 풀을 뜯어 먹었든지 배가 농구공만큼이나 포만해져 누런 잔디 위에 드러누워 있다. 자는 지 졸고 있는 지 알 수는 없으나 이따금씩 반추(反芻)하는지 입만 움직인다. 이 녀석들도 어지간히 나처럼 권태로운 모양이다. 내가 옆을 지나가도 되새김질만하고 눈을 떠 보이지도 않는다. 조금 더 오르니 소슬한 바람마저 분다. 이럴 때를 옛 어른들은 `한운야학(閒雲野鶴)’이라 했으니 한가롭게 흐르는 구름과 들에서 자유스럽게 노는 한 마리의 학처럼 구애 받지 않고 번거로운 세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니는 것을 말했으리라. 아무도 없는 산길이라 좀 쓸쓸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복잡한 것 보다 훨씬 낫다. 고양(高揚)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언덕 밑에 외딴 오막살이 옆에 몇 평 안 되는 밭에는 벌써 가을걷이를 끝냈는지 심어 놓은 수수대나 콩 깎기는 온 데 간 데 없고 빛바랜 허수아비만 홀로 서있다.
참새 몇 마리가 허수아비 머리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영역 싸움을 하는지. 자리다툼이 한창이다. 요사이는 새나 까치들도 허수아비를 허수아비로 보는 모양이다. 무서워할 줄도 모르고 장난치고 노는 걸 보면 사람이 영리하면 그만큼 동물들도 영악해지는 모양이다. 큰 들녘에는 허수아비에 확성기까지 달아 새를 쫓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말하자면 시청각을 동원한 셈이다. 추석 연휴가 끝나니 이젠 손자들도 다 떠나고 조용해졌다. 그 녀석들이 가고 나니 텅 빈 집 같다.
긴 추석 명절이 끝나고 나니 공허한 마음마저 든다. 사람 사는 집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긴 생각에 잠긴다. 역시 추석은 전쟁이다. 이곳에서 떠난 지 벌써 10시간도 넘었는데 귀경길이 새벽까지 막혔다고 TV에서 비춰준다. 와도 걱정, 가도 걱정, 있어도 걱정이 인생길인가 보다. 오늘 아침 출근해서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북에서 핵 실험을 강행했다는 속보다. 한반도가 핵 회오리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핵 실험 땐 다른 세상에 살게 될 것’ 이란 럼스펠드도 일본, 미국, 중국, 소련도 유엔 안보리도 허수아비로 본 이 `세계의 깡패’ `무법자’`악의 축’ 달러를 위조하여 세계경제를 뒤흔들어 놓은 `막가파’는 시청각 교육부터 다시 받아야 될 모양이다. 허수아비를 허수아비로 보았다면 다음은 소리 나는 ` 새총’ 밖에 약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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