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秋에는 죄다 떨어져 버려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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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秋에는 죄다 떨어져 버려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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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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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옥근/의학박사
 
 낙엽처럼 시월이 졌다. 십일월은 가을과 겨울의 건널목. 달력장 위에는 벌써 하얗게 얼어붙은 설경이 펼쳐진다. 이제 날이 춥다. 정말 멀지 않아 대지가 꽁꽁 얼어붙을 것이다. 나목(裸木)들의 앙상한 가지들이 떨고 있다. 형틀이 삐걱거리는 것 같은 그 음산한 북풍은 굳게 닫힌 우리들의 창문을 두드릴 것이다. 비정의 겨울을 푸른 초원과 소조(小鳥)가 울던 평화의 그 수풀을 덮을 것이다.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조급해졌다. 거리에서 파는 군밤의 따스한 촉감으로도 이제는 썰렁한 마음을 달랠 수는 없다.마지막 국화들이 의연한 자세로 가는 계절을 붙잡고 있지만 그것도 결국 시들고 마는 것, 모든 색채, 모든 향기,그리고 모든 생의 운기는 눈을 감고 동면 속에 잠길 것이다. 어느 시인의 독백과도 같은 산문이다.
 우리가 엄벙덤벙 하는 사이 11월은 벌써 우리 앞에 서 있다. 10월 중순의 별난 날씨가 제 값을 하고 있다. 강원도 강릉 일대 영동 지방은 태풍수준의 폭우와 폭풍으로 도로가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고 뽑혀진 가로수들이 마치 서양의 `토네이도’를 연상케 한다. 이렇게 11월은 샛노랗게 태어났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나보다’ 11월을 맞이하기 위한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더 이상 11월만은 삭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10월이 단풍의 계절이라면 11월은 낙엽의 계절이란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 갈색톤 쇠잔해진 천지는 더 이상 따스한 가을은 기대할 수 없나보다. 마른 찬바람이 들녘을 스쳐지나 갈 때마다 그저 스산할 뿐이다. 벼들을 다 베고 난 그루터기에서는 벌써 새순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난 곳도 있다. 마지막 생명의 흔적을 태워보지만 이 또한 부질없는 노릇일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억새밭에 한 번 다녀오자고 조르는 친구들 성화에 못 이겨 토요일 오후라 멀리 갈 수는 없고 가까운 산을 택했다.여러 갈래길이 있지만 지루하지 않는 계곡 길을 따라 맑고 고운 물이 흐르는 물소리도 좋았지만 더 좋은 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가을의 정취였다. 계류(溪流)를 따라 흘러 내려가는 단풍의 잔해들, 가을하늘 빛을 받아 양지쪽 언덕 위로 뻗어 올라간 담장이 넝쿨, 옻나무, 단풍나무가 바쁜 우리들의 발목을 잡는다.그간 늦가뭄과 더운 날씨로 단풍다운 단풍을 보지 못한 터에 우리 눈은 갑자기 밝아진 느낌이었다. 산 위,수 십 만평 초지에는 아직도 만개 되지 않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무심코 지나가던 나에게 친구가 억새밭에서 `억새 우는 소리를 들어보란다.억새 우는 소리가 무슨 작은 짐승이 갈대를 부비며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린다. 군 생활을 오래한 그 친구는 억새가 바람에 고개를 숙일 때마다 졸병들로부터 마치 사열이나 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하루 길을 지치게 걸어온 촌노가 석양 비끼는 언덕길에 올라와 고개 숙이며 은빛 머리카락을 날리는 것처럼 보였는데.주위가 아주 넓고 전망이 좋은 산장 같기도 해서 물어 보았더니 몇 년 전만해도 잘 나가던 목장이었단다.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이제는 축사도 건물들도 이미 뜯겨나가 폐허가 된 자리에 빛바랜 억새만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옆에서 이 터를 지키고 있는 노목이 날씨 탓인지 습기를 모두 내뱉은 나뭇잎들이 단풍도 들기 전에 앙상하니 떨어져 수북이 쌓여있다. 그 자리를 돌며 만추의 모색(暮色)만큼이나 쓸쓸함을 느낀다. 하산할 때는 또 다른 정취를 느끼기 위해 다른 길로 걸어 내려왔다. 길가에 여기저기 누구도 심어 놓지 않는 주인 없는 들국화의 향기에 흠뻑 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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