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 시인의 '고래와 수증기'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내 수많은 이름 중/가장 슬픈 이름은/너라는 이름이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하얀 눈 위에/ 넌 잠들어 있었지/네 곁에 나는 가만히 누웠어// 너를 처음 보았을 때/난 잠옷을 입고/널 따라갔어/네 잠옷 속에 들어가 웅크렸지// 무서워도 난 소리 내지 않고/사랑해/무서워서 난 소리 내지 않고/사랑해// 내 수많은 이름 중/가장 슬픈 이름은/ 네가 불러준 이름이야”(`Let me in’ 전문)
낭독의 진정한 맛을 아는 시인 김경주. 그의 시는 그 자체로 음악이다. 시를 읽는 내내 그 리듬이 정신을 지배한다.
그가 최근 시집 `고래와 수증기’를 펴냈다. 그는 2003년 등단 이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문단의 무수한 찬사를 받아왔다.
그는 특히 의미의 확장, 시와 외부장르 통합 등 다양한 시적 시도를 해왔다. 이번 시집은 그의 다양한 시도가 시의 논리와 결합해 탄생됐다. 시집에 담긴 51편의 시는 초기 산문시에 비해 형식적으로 정돈됐다. 간결해진 언어만큼이나 여백과 행간에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비롯해 이전에 발표한 시집이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었다면 이번 `고래와 수증기’는 지겹고 지겨운 일상에 대한 탐구의 흔적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입김, 구름, 물보라, 안개 등 금세 형체가 사라지는 것들에 주목했다. 그는 흘러가는 것의 실제를 붙잡아 놓음을 통해 `순간’속에 숨어있는 `순환’을 발견한다. 이 시집의 제목인 `고래와 수증기’도 같은 맥락이다. 고래는 깊은 바다 속에서 자맥질했다 수면으로 올라와 수증기를 내뿜는다. 그에게 시는 고래가 자맥질 후 뱉어내는 긴 수증기와 같다. 그는 깊고 깊은 곳에 묻어놨던 언어를 뱉음으로써 비로소 세상과 소통한다.
“옆구리가 터진 채/ 해변으로 흘러온/고래의 파란 흉터에/ 그냥 눈물이 나// 국자에 뜨거운 수프를 받아와/ 다친 고래의 입술에/ 부어주는 소년과/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에/ 그냥 눈물이나// `내가 집에 데려갈게’/눈발 속에서 입을 맞추는/둘의 자폐에/그냥 눈물이나//(…)// 언제부턴가 신문지는 꽃잎이나/말리는 것으로 사용했는데/(…)/그런데 오늘 아침 기사는// 시집은 쌉니다// 그냥 눈물이 나/나, 그냥”(`그냥 눈물이 나’ 중 일부)
특히 이번 시집에는 `시 쓰기’와 `시 읽기’에 대한 세상의 외면과 마주하는 그의 자의식이 투영돼 있다.그는 `그냥 눈물이 나’ 등 시집 속에 담긴 여러 편의 시에 시가 외면 받는 현실에 대한 통탄과 깊은 비애를 담았다.
그는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 2000년대 초반부터 `소규모 낭독모임 펭귄라임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를 낭독해왔다. 이번 시집 속 대부분의 시 또한 이 낭독 모임에서 발표한 것들로 끝임없는 퇴고를 통해 음악성과 간결함을 살렸다. 그는 시집의 뒤표지에 “긍지와 고뇌, 외로움으로 세월에 남겠다. 그렇게 믿고 싶다”고 썼다.
고래는 꿈을 꾼다. 깊은 자맥질 후 비로소 마주한 세상을 함께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고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깊은 자맥질을 한다.
김경주. 문학과지성사. 8000원.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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