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전통 문화이자 예술”
  • 이진수기자
“굿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전통 문화이자 예술”
  • 이진수기자
  • 승인 2017.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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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人… 동해안별신굿 보유자 김용택
▲ 동해안별신굿 보유자 김용택씨는 ‘굿’으로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그는 “동해안별신굿 전수관을 건립해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는 것이 남은 꿈이다”라고 했다.

[경북도민일보 = 이진수기자]   “장구 장단을 제대로 쳐. 그리고 소리를 할 때는 큰 소리로 해.”
 춥고 긴 겨울이 물려났다. 봄바람이 스며드는 3일. 젊은 국악인들이 동해안별신굿을 배우는 포항 해도동의 한터울.
 중요무형문화제 제82-1호 동해안별신굿 보유자 김용택(72)씨가 “장단과 소리가 맞아야 돼 부끄러워 말고 크게 내질려”라며 다그쳤다.
 동해안별신굿 가운데 세존굿 수업이다. 국악 전공 출신으로 상당한 수준의 이들도 초보나 다름 없었다.
 김도연(45·여)씨는 “사물놀이 장단과는 사뭇 다른데다 소리까지 넣어야 하니 여간 힘들지 않다”며 “그래도 동해안별신굿 보유자이신 선생님한테 직접 배우니 기쁘다”고 했다.
 김용택. 해방 이듬 해인 1946년 포항에서 태어난 그는 동해안별신굿을 선대부터 가업으로 물려받아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허나 ‘굿’하나로 살아온 그의 삶이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때로는 신산하고 혹독하기도 했다.
 집안의 무악은 증조모(이옥순)로부터 본격 시작됐다.
 “증조모는 성안(궁궐)에서만 굿을 했다. 임금 앞에서 굿을 하기도 했다. 성밖에서 하는 일반 굿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만큼 기량이 출중했다. 증조모가 증조부(김천득)에게 시집 오면서 무악은 자연스럽게 우리 집안의 세습무가 됐다. 포항에 터전을 잡게 되면서 증조에서 조부(김범수, 성수, 영수)와 부친 형제(김호출, 외동, 석출, 재출), 그리고 나와 친척들에게 까지 전수됐다.”
 동해안별신굿 4대 세습무의 계승이다. 가족들 대부분이 무악을 했으며 하나같이 기량이 뛰어났다.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듬 해인 1954년 부친(김호출)의 손에 끌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맹방리 산골짜기에 들어갔다.
 아홉살 코흘리개 소년의 동해안별신굿 산공부의 시작이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 초가에서 굿거리, 동살풀이, 드렁갱이장단 등 굿에 필요한 장구 장단을 익혔다. 부정굿, 골맥이굿(성황굿), 조상굿, 세존굿, 성주굿, 심청굿, 용왕굿 등 동해안별신굿의 모든 것을 하나씩 배워 나갔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을 많이 했다. 악보도 없었다. 그냥 몸으로 익혔다. 제대로 못하면 부친의 매가 몸에 다가왔다. 산속 추위 만큼이나 당신의 가르침은 혹독했다. 그렇게 9년의 세월이 흘렸다. 열일곱에 별신굿을 모두 전수받아 산을 내려왔다.”
 남들은 20여년이 걸릴 것을 절반에 마무리했다. 부친의 가르침도 있었지만 타고난 재주도 한몫했다.
 굿 공부 때문에 정작 학교는 뒷전이라 결석이 잦았다. 부친의 간곡한 부탁과 학교 측의 배려로 포항 월포초등, 해아중(현 청하중). 동지상고(현 동지고등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했다.
 요즈음 같으면 어림없는 시절이었다. 뒤늦게 우석대학교에서 국악을 전공하기도 했다.
 산을 내려오자 마자 굿판에 섰다.
 “집안 어르신들과 경주 감포와 포항 구룡포, 대보, 연암, 칠포, 지경 등 바닷가 마을을 전전했다. 굿판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잘한다’, ‘최고다’라는 추임새와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동해안별신굿은 부산에서부터 경주, 포항, 영덕, 울진, 강원도 어촌마을까지 쉼없이 거슬려 올라갔다.”
 험한 풍랑으로 조난사고가 잇따라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생계 터전인 바다에 생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바다는 그렇게 사나웠다.
 동해안별신굿은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다. 어부들이 고기를 많이 잡고 무탈을 바다 용왕께 비는 것이다. 
 또한 억울하고 원통한 넋을 달래고 액운을 물리치고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한다.
 굿이 열리면 그 마을은 물론 이웃 주민들도 ‘굿보려 가세’하며 몰려 들었다. 무녀의 소리와 춤, 악사들의 장단에 주민들은 울고 웃고 어깨춤을 췄다.
 몇일간 이어지는 굿판은 당시로는 마을 공동체의 화합이며 축제의 장이었다.
 열여덟에 어여쁜 여고생(강릉여고)이 새어머니(이금옥)의 수양딸로 들어왔다. 그런 인연으로 4년 후 스물두살에 정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지금도 함께 굿을 하며 해로하고 있는 아내 김영숙(동해안별신굿 전수 조교)씨다.

 “무악에 회의를 많이 느꼈다. 집안에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가 한명도 없어도 무당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주위의 천대와 멸시가 따가웠다. 굿이 전통 문화 또는 예술이 아닌 혹세무민의 미신이라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다른 직업을 갖자며 울산의 기업체에 취직했으나 얼마 후 사직서를 냈다. 어릴때부터 운명처럼 몸에 벤 무악을 떨쳐내지 못한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렸다.
 마침내 그의 기량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문화재청은 2006년 6월 19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2-1호 동해안별신굿 보유자’로 지정했다.
 중요무형문화재는 음악·무용·연극·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인 것 가운데 역사·학술·예술적 가치가 크고 향토색이 현저한 것을 말한다.
 정부는 전통 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했다. 보유자는 ‘인간문화재’라 불린다.
 작은 아버지(김석출, 1922년~2005년)의 큰딸 김영희씨도 같은 날 보유자로 지정돼 집안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이제야 내가 큰 결실을 거둔 것 같았다. 다만 부친을 비롯해 집안 어르신들의 기량이 출중한데도 문화재법 제정 전에 세상을 떠나 보유자로 지정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행히 김석출씨는 살아 생전에 동해안별신굿 보유자(제82호)로 지정됐으며 김재출씨의 아들 김정희(동해안별신굿 전수 조교)씨는 보유자 지정을 앞두고 있다.
 동해안별신굿이 해외로 나갔다. 굿의 ‘한류’다.
 장구 하나 들고 일본(도쿄, 오사카, 교토), 영국(런던), 독일 등 해외에서 굿판을 벌였다. 일본은 한달에도 서너번 갔다.
 교포들과 현지인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우리 것이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장구에 김덕수, 이광수 등 내놓아라 하는 사물놀이 명인들도 감탄한다.
 산업화시대, 정보화사회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의 굿은 줄어 들었다.
 반면 무대 공연은 오히려 많아졌다. 굿이 전통 문화이며 예술이다는 인식과 함께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대중화된 것이다.
 여기저기 수많은 공연을 다녔다. 올해 설을 앞둔 1월 21일에는 국립부산국악원에서 공연했다.
 남녀노소가 어울려 신명나게 흥겨워했다.
 부친에게 굿을 배운 소년은 어느덧 고희를 넘어섰다.
 “부친은 ‘너가 굿을 해먹으려면 제대로 배워야 돼. 그래야 이름있는 굿쟁이가 된다’며 혹독하게 가르쳤다. 가르침은 자양분이 됐다. 내 인생에 부친의 영향이 가장 컸다.”
 가르침은 자신에게 스며들어 이제는 제자들에게 ‘제대로 배워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늘 강조한다.
 굿을 계승·발전시키 위해서는 전수관이 필요했다. 여기저기 떠돌면서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동해안별신굿의 본 고장이자 선대부터 뿌리를 내린 포항에 괜찮은 전수관을 짓고 싶었다.
 수년간 무단히 애를 섰다. 당사자의 부지가 있어야 하기에 가족들이 힘을 모아 어렵게 포항 기계에 땅을 매입했다.
 수십억원이 드는 건축 비용은 지자체의 지원이 있어야 했다. 공직의 관계자들에게 수차례 설명했다.
 굿이라는 전통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인지, 재정이 여의치 않는지 포항시에서 좋은 소식이 없었다. 
 진도씻김굿이나 서해안별신굿 등은 전수관이 있는데… 심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이후 부지는 매매됐다.
 “동해안별신굿으로 외길 인생을 살았다. 내게 남은 것은 ‘굿’하나 뿐이다. 굿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전통 문화이며 예술이다. 맥이 끊기면 안된다. 전수관을 건립해 나의 기능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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