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재즈는 가을의 순간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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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재즈는 가을의 순간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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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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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페트루치아니의 ‘September Second’

아무리 떠올려도 ‘September Second’를 어디에서 듣게 된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블로그의 배경음악으로 한동안 사용했는데, 어디에서 이 곡을 듣고 구매로 이어지게 된 건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특별한 감정을 가졌기에 제목을 알아뒀을 텐데. 과거의 순간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음악이다. 그렇기에 이 곡만으로는 어떤 순간을, 장면을, 기억을 소환해낼 수는 없다. 다만 이 곡의 느슨한 도입부와 돌연 현란해지는 연주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정서가 남았고 이제는 딱히 다른 건 필요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만 36세에 생의 연주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미셸 페트루치아니를 소개할 기회가 생겼으니 어쨌거나 다행인 것이다.

나에게 재즈란 고독의 표상인데, 이 괴짜 예술가의 연주에는 그런 감정이 점철되어 있다. 신체적 장애를 가리켜 괴짜라고 부르는 건 아니다. 골 형성 부전증이라는 질병을 앓은 그의 키는 1m가 넘지 않아 일반 피아노를 연주하기에는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건반과 가까이 의자를 높이고 옥타브를 제한하며 페달을 누르는 장치를 발에 닿게 고정시켜야만 했다. 이 같은 사정으로 그만의 리듬이 생기고 독창적인 선율이 완성되었다. 오히려 내게는 음이 낙하하는 지점에서 발견되는 섬세하지만 단단하고도 아름다운 화성이 그를 괴짜처럼 보이게 했다. 건반을 힘차게 누르기 위해 다소 한쪽으로 치우친 음의 기움과 그 기움으로 절제된 음악적 침묵이 그의 재즈를 특별하게 만들어 냈다. 미셸 페트루치아니는 6년 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말보다 9년을 더 연주했다. 그에게 펼쳐진 인생의 풍경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뤄진 건반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건반은 세상의 시작이자 끝인지도 몰랐다. 어두운 무대의 피아노 의자에 살짝 걸치고 앉은 그는 마치 공중에 뜬 사람,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검고 둥근 재즈의 이데아처럼 보이기도 했다.



-검고 둥근 재즈의 이데아

간혹 내게 재즈는 개별이 아닌 공통으로 다가온다. 재즈를 처음 들을 때만 해도 그랬다. 뮤지션 별로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재즈면 그냥 좋다는 식이었다. 그러고 보면 재즈에 빠져들었던 이십대 중반의 나는 노을이 내리는 낙동강변을 곧잘 달렸다. 하굿둑에서 출발해 한 시간여 달려 나가면 삼락공원의 갈대밭이 나왔고, 반대로 달려가면 다대포의 바다였다. 낙동강만이 그런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에선 강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지점은 제법 황량하다. 노을이 지는 순간은 더하다. 그런 풍경과 재즈가 공존하던 시기를 거쳐서인지 아직까지 재즈를 들으면 강변에 넓게 퍼진 짙은 빛과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턱까지 차오른 숨을 컥컥 몰아쉬던 나의 이십대가 애처로운 풍경으로 뒤따르고야 만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강변을 달렸을까. 나의 미래가 이렇게나 금방 다가올 것이라고 예감은 했을까.

-미셸 페트루치아니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은 온 것 같지만 사실 완전히 온 것은 아니다. 가을에는 바람이 달리 불어야 하며, 기분이 단조로우면 안 된다. 다짜고짜 와서도 안 되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끈질기게 오지 않은 척을 해야만 한다. 그러다 돌연 표정을 바꾸어 마음을 산산이 부수어 놓더라도 뒷일을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것이야 말로 가을의 역할이고, 가을의 풍경이다. 그리고 재즈는 가을의 순간에 온다.

한편으로 가을의 순간은 보다 선명하게 형체를 갖추어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의 새로운 음반이 바이닐의 형태로 ‘This is Michel Petrucciani’라는 제목을 달고 올 초 프랑스에서 제작 되었고 그 앨범에는 ‘September second’가 담겨 있다. 미셸 페트루치아니는 잘 포장된 상자 속에서 머나먼 항해를 마친 끝에 내게로 오게 될 것이다. 나는 상자를 풀고 번쩍이는 바이닐을 턴테이블 위에서 올려둘 것이다. 나의 가을이 제 시간에, 제 장소에 도착하길 바랄 뿐이다. 마치 처음 마주하는 것만 같을 그 가을이 나는 영영 그리워진다. 9월의 순간은 조금씩 지나가버리는 중이고, 재즈의 순간은 조금씩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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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견 2019-10-20 00:03:29
이 글을 읽게 되어 감사하네요.
과거의 순간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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