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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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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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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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된 몸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두 아들을 대학교까지 졸업시켰으나 30대 후반이 되도록 취직도 못하고 집안에서 뒹굴며 여러 가지 일들로 속을 썩이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실의에 빠진 누님이 있었다. 가끔씩 집안일로 만날 때면 초점 없는 눈동자에 온갖 회한과 시름을 담겨 있었고 희망을 잃어버린 절망한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바쁜 일상이었지만 잠시 짬을 내어 누님을 찾았다. 아내 몰래 준비해 둔 용돈을 다시금 확인하며 집안으로 들어섰는데 문을 열고 나오는 누님의 모습이 두어 달 전에 비해 웬일인지 사뭇 밝고 환했다. ‘아마도 춘사월 봄이다 보니 기분이 좀 좋으신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중에 누님이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몇 년 전, 누님이 다니는 공장에 50대 중반의 남자가 입사하였다고 한다. 얼핏 보기에도 도무지 이런 험한 일을 할 사람 같지 않아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희고 고운 손은 작은 물건을 들 때마다 파르르 떨렸고 오후가 되면 걷는 것도 힘든 듯 식은땀을 흘리며 자주 털썩털썩 주저앉곤 하였다. 그런 그가 안쓰럽고 불쌍해서 누님은 제 몸도 추스르기 힘들었지만 틈틈이 그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8월의 폭염이 피부를 태워 버릴 듯한 찌는 더위 속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사람들과 함께 삼겹살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회식을 하게 되었단다. 몇 잔의 막걸리에 취한 누님은 그 사람을 붙들고 고달픈 삶의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자식들만 바라보며 모진 고생, 모진 설움 모두 견디며 살아 왔건만 오히려 불평과 원망만 하는 두 아들로 인해 삶의 의욕과 애착을 모조리 잃어 버렸다오. 전에는 일을 해도 힘든 줄을 몰랐는데 요즘은 하루하루가 왜 이렇게 힘들고 지치는지! 후~우..”

누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없이 막걸리만 들이키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 지역에서 웬만한 사람이면 알만한 식품관련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다. 경제위기의 한파가 몰아치던 시절을 맞아 어렵게 위기를 넘겼으나 얼어붙은 경제는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고 끝내 매출감소로 인해 회사는 도산하여 그는 많은 부채를 지게 되었다. 좀 도와 달라고 일가친척, 친구들을 찾아 애원했으나 모두 외면해 버렸고 빚쟁이들은 날마다 찾아와 피를 말렸다. 그는 절망과 함께 세상의 비정함에 치를 떨었다.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의 아내만 곁에 남아 생계를 위해 제단공장에 취업하여 일을 다녔으나 그는 이삼일이면 방안에 소주병이 가득 찰 정도로 술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았다. 지병이던 고혈압과 당뇨도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때 내손으로 목숨을 끊을 용기만 있었다면 나는 죽었을 것입니다. 용기가 없어서 죽어지기를 바라며 술만 마셔 댔지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술에 빠져 2~3년이 지나도 죽지는 않고, 저녁마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긁힌 상처가 있는 손으로 퇴근하여 저녁상을 차려 놓고 훌쩍이는 아내가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지만 여전히 그는 술에 빠져 살았다. 어느 날, 그 날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갈증으로 잠이 깬 그는 방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나님 상처받은 제 남편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시고 절망한 저 마음에 희망을 주소서. 저는 이제 가진 것이 없어 눈물밖에 드릴게 없사오니 제 남편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소리죽여 흐느끼는 아내를 보고 그는 아내가 출근한 뒤에 방안에 주저앉아 온종일을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아내를 위해 마음을 고쳐먹고 일자리를 찾다가 이 공장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되다니”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리고 너무 힘이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씩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는 여인의 가냘픈 몸으로 꿋꿋하게 일하며 틈틈이 그를 도와주기까지 하는 누님을 보며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고 했다. 희고 고왔던 하얀 손이 검게 그을린 채,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단다. “전에는 아주머니보다도 무거운 것을 못 들었는데 요즘은 그 두 배는 들 수 있어요. 많이 움직이니 고혈압과 당뇨도 좋아져서 건강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힘내세요. 이젠 제가 도와 드리겠어요”

이야기를 마친 누님의 눈가도 젖어 있었다. 지난한 세월을 살아온 누님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초연한 표정으로 “나만 아픈 것이 아니더구나! 나와 같은 삶을 살면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구나! 그러니 나도 또 살아가야지” 라고 말하는 그 얼굴에 바라보노라니 형용할 수 없는 연민이 밀려왔다.

좋은 봄날처럼 건강하게 잘 보내시라며 그만 들어가시라 해도 끝내 골목어귀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주시는 누님을 뒤로 하고 돌아가는 길가에는 노란 민들레가 피어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어디선가 진한 풀 냄새가 코끝에 사무쳐 오는 아득한 길의 끝자락에 붉은 노을이 물들어 오고 있었다.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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